세상의 신 2 (단 3:1-12) - 9강

신자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신앙적인 문제는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데 왜 어려움이 끊이질 않고 일어나느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혹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닌 것으 안다고 해도 정작 어려움 앞에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하나님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들을 전혀 해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우리의 편안함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를 주기 위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지켜 주고 자기를 번영시켜 주는 신을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상은 단지 형상이 있기 때문에 우상이 아니라 그 앞에 어떤 마음으로 나오는가가 믿음의 대상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한 탐심으로 신을 찾을 때 그 신이 누구든 그것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몰랐기 때문에 조그만 문제에서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셵던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자주 보이는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치와 멸시를 받고 죽게 하셧고,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감사하도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목슴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내 목숨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목숨으 보존하고 굳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顁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신입니다. 세상의 신은 우리의 목숨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정성을 요구합니다. 신에 대한 정성만 보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주겠다는 것이 세상의 신입니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미신이 되는 것이고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세상의 신으로, 기독교를 미신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조그만 정성과 열심만 보이면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신자들에게서는 목숨을 포기한 신앙이 아니라 십일조 바치는 정도의 사랑만 보이고 있고, 정작 내가 희생해야 할 자리에서는 돌아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세상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요구합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것을 순교하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주신 것으로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극복되지 않을 때는 기꺼이 순교하는 것입니다. 살려는 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쪽을 택하는 것이 신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에게 절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친구는 금신상에게 절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금신상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섬기는 신은 세상에 없는 신이었습니다. 세상에 없는 신으 따를 수 없다는 것이 다니엘 세친구의 모습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다니엘의 세친구에게는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이지 금신상은 그들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느부갓네살도 그들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느부갓네살도 그들의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다는 것을 다니엘의 세친구는 세상에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장애물을 발생시키십니다. 다니엘의 세친구에게서와 같이 금신상을 우리 앞에 세워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같은 힘있는 자로 하여금 절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신자는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보고 계시는데 내가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마듬가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다니엘의 세친구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느부갓네살이 있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과 바벨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왕이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포로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다니엘과 그 세친구를 부각시키시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금신상에게 절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서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명령도 함께 합니다. 여기서 세친구는 어느 방향으로 순종합니까? 죽인다는 그 명령으로 순종합니다. 세친구가 단지 절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의도였다면 그들은 도망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겠다는 그 말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다니엘의 세친구는 자기를 살리는 쪽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쪽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또 다른 누구를 왕으로 섬겨야 할만큼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항상 부족을 느낍니다. 이웃이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내것이 넉넉함을 느끼지 못할 때 결국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그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나에게 있는 것으로 넉넉함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신자는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에게 자신의 왕은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자기를 살리는 쪽으로 가지 말고 자기를 죽이는 쪽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이 나의 왕으로 나를 다스리실 때 나는 두려울 것이 전혀 없는 삶으로 나아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