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제의 삶 (신 15:1-11)

말라기 3:8,9절을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교인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안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공포의 구절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저주를 받는 길이다'라는 말로서 교인들에게 엄포를 놀 때 본성적으로 저주를 두려워하는 인간들로서는 십일조를 안한다는 것은 실로 모험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울며겨자먹기로 십일조를 하면서 그 돈이 헛된 돈이 되기를 싫어하는 마음에 십일조로 인해서 자신에게 복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말씀에 기대를 걸고 십일조를 하게 됩니다. 즉 저주를 피함과 동시에 복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함으로서 10절의 말씀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바쳤다고 해서 복을 주고 돈을 바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내리는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꾼들이 상상해 낸 사이비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돈을 기준으로 해서 복과 저주를 나누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종교 행위(예배, 전도, 구제, 선교, 봉사, 기도, 성경 읽기 등등)를 기준으로 해서도 복과 저주를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복안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복,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자기 자식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까? 내 자식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귀한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잘하는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성경 보는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즉 인간의 행위는 전혀 보지 않으시고 택한 백성들에게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복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안하면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까? 오늘날의 십일조는 단지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놓는 것이지 구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십일조는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말씀의 의미도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어놓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십분의 일을 내어놓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면 결국 나의 소득에서 하나님의 것은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십분의 구는 내것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적질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챙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도적질하는 것으로,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심한 말씀으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까?

말라기 당시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 같이 스스로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점차 희미해져 갔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 할 때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고 함께 먹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매 3년마다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내어서 저축을 해야 했는데, 그 용도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그리고 나그네 고아 과부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나 혼자 즐겁게 먹고 마시고 배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없는 자들과 함께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 나누는 십일조 였던것입니다. 이것이 말라기에서 말씀하는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배려에 대해서 소홀해져 갔으며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으로 없는 자의 배고픔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등 약자들을 위해서 3년마다 따로 십분의 일을 저축하라는 규례는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일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하나님 성전의 창고가 비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규례를 세우신 것은, 단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 속에 가난한 자들을 있게 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만약 가난한 자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다면 굳이 인간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구제 역시 단순히 없는 자들을 돕는 차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회 속에 가난한 자들을 있게 하신 것이나, 그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발전하고 번영한 힘있는 국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국민이 단결해서 나라를 위해서 힘써 일하는 국민성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사를 열심히 시행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애굽에서 나올 때의 이스라엘을 원하실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는 모두가 종이고 나그네고 객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너나 할 것 없이 약자였습니다. 모두가 고아이고 과부 같은 신세였습니다. 부자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구출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애당초부터 자기 것이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약속의 땅에서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해서 추수를 한다고 해도 그 수확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단지 십분의 일을 낸다고 해서 십일조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득에서 처음 난 것, 맏물이 곧 십일조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난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치고, 다시 그것으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우린 여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있는 자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다' 이것이 약자의 정신이고, 여전히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위치에서 살아갈 때 가질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약자는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우린 하나님 때문에 살아가는 민족이다'는 이 정신에 대해서 결코 희미해지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약자의 정신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신이 온 국가에 퍼지는 것이 이웃 사랑의 내용이고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결국 가난한 자는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 사회에 있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풍족해지기 시작했을 때 과거의 자신의 위치와 처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노력과 힘으로 얻은 것처럼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아버립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도 나를 복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로 인해서 소외된 계층은 자연히 약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약자가 소외되고 무시되고 그들이 굶주린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이러한 정신 아래서 바라볼 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즉 오늘 본문은 앞서 나오는 십일조의 정신이 이스라엘 내부에 확산되었을 때 나타나야 할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행하기도 무척 곤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상당한 곤란과 번민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희색이 만면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이용하여 득을 보려는 욕심도 생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7년을 '면제년'이라고 정하고 7년이 되면 이웃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은 그 돈을 면제하라고 합니다. 또 8,9절을 보면 가난한 형제가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하고, 혹 면제년이 가까웠다고 해서 주지 않으면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없는 자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지만 있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무거운 짐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7년이 되면 면제를 해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꾸어주기를 요구하면 꾸어주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돈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있는 사람들에게 빌려준 것을 7년째에는 면제해 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물론 적은 액수라면 충분히 면제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큰돈이 아닐 때는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기 위해서도 충분히 면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돈일 때는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면제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우선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규례는 단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면제하라는 말씀도 7년이 지나도록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가난한 자의 사정이 딱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세우신 규례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본문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도웁시다'라는 교훈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고 합니다. 매 칠 년이란 안식년을 말합니다. 즉 면제는 아무 때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년 끝에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식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로 인해서 깨어진 안식이 하나님의 희생 덕분으로 회복되는 날입니다. 즉 하나님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가 면제됨으로 이스라엘이 안식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노동을 쉼으로서 맛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동의 대가로 안식을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면제받음으로 안식을 누리게 된 자로서 그 인식을 배우고 가르치라는 의미로서 빚을 면제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돈을 빌려준 사람은 면제해 줌으로서 '나도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죄가 면제됨으로서 안식을 누리는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가난해서 돈을 갚지 못한 자는 면제받음을 통해서 역시 '나는 하나님의 면제해 주심 덕분에 안식을 누리는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면제를 모를 때, 그 사람에게는 '면제하라'는 규례가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 18:21-35절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고 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결국 주인으로부터 받은 면제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면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면제를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빚이 탕감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쏟아 부음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십일조는 맏물이며, 신약에서 맏물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맏물을 받으시고 그 맏물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우리는 맏물을 먹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맏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오늘도 우리는 그 몸과 피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일조의 정신이 확산되어 있는 이스라엘이라면 안식년 끝에 빚진 자를 면제한다는 것은 능히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의 빚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자였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의 실체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죄의 빚을 탕감 받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복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해서 쩔쩔매는 가난한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의 거울인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발견하고 그렇게 저주 아래 놓인 죄의 빚을 갚아주셨기 때문에 안식을 누릴 수 있었음을 안다면 그 감사함과 은혜 안에서 빚을 면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면제하라'는 규례를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서로 빚을 탕감해주는 아름다운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면제를 마음에 담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되는 것이었습니다.

'면제하라'는 말씀 안에는 우리 죄를 면제하신 하나님의 희생 안에서 구원을 확인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면제해준다는 것은 빚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지 빚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 죄를 면제하신다는 것은 죄의 값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지 죄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죄의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값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확인하라는 것이 면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십일조의 규례나 면제의 규례 등을 통해서 확인하며 살아가도록 하셨지만 오늘 우리들은 그런 규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법의 완성자로서 규례의 정신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규례를 통해서 은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은 가난한 자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린 한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명령대로 지켜 행하면 복을 준다는 것은 흔히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우리의 상식은 말씀대로 행하는 나자신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복받았다는 것은 내가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남이 잘 된 것을 가지고 내가 복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이것이 말씀을 듣고 명령을 다 지켜 행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결국 개인적인 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지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가난했던 자들에게 돈을 줘서 가난을 없애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물질의 부유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의 부유함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자체가 복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셔서 율법을 이루심으로 그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은혜의 부유함을 누리고 사는 복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자가 참으로 가난한 자이며 불쌍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의 부유함으로 사는 자는 가난한 자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7-1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는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 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 가난한 자란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국가에 도움이 안됩니다. 오히려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 주위에 가난한 자가 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부유한 친척은 반갑게 맞이하고 가까이 하면서도 가난한 친척은 멀리 하려고 하고 만나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만나면 도와줘야 할 대상이지 나에게 도움을 줄 힘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사회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사회는 그러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요구하는 대로 꾸어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면제년에 빚진 것을 면제해주는 정신이 살아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7년째만 은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죄의 빚을 면제받은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부유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나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바로 그 도구로 쓰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의 부유함이 나눠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살므로서 모두가 하나님의 복안에 거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신자는 나누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돈만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는 자는 돈을 나누면 되고, 건강이 있는 자는 건강을 나누면 됩니다. 병이 든 사람은 병든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면 됩니다. 이것이 모두가 부요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나누어야 할 형제이고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 이웃은 내가 찾아서 선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웃을 찾아서 그 다음에 그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내가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찾게 되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7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라고 말씀합니다. 즉 내가 어디에서 살든지 이웃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상황이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지독한 가난뱅이가 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상황입니다. 문제는 사랑할 준비가 된 마음으로 살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눅 10:30-37절에 보면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도 만나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주신 상황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상황을 피합니다. 사랑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랑할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와 사마리아 사람은 한쪽은 도움이 있어야 살아날 수 있는 처지이고, 한쪽은 도와줄 수 있는 건강과 여유가 있는 사람으로 만난 것입니다. 즉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가 자신을 도와줄 힘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자비와 불쌍히 여김 받는 관계가 이웃 관계입니다. 따라서 내 이웃은 누구냐? 라는 질문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을 무능한 자라는 위치에 놓고 볼 때 누가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을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평소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자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던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자를 만나게 해도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자로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평소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라는 교만으로 살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만들어 주신 축복을 누리는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강도 만난 자를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 수 없었고 그런 마음에서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나타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강퍅히 대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요구하는 대로 꾸어주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혹,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나에게 돈 좀 꾸어달라고 하면 거절해야 하나 빌려줘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끝까지 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겠다는 고집밖에 되지 않습니다. '돈을 꾸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꾸어주고 싶으면 꾸어주십시오. 본문의 말씀은 너희들이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로 살아가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는가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신 가난한 자를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부유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강제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자와 나누도록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기적의 일을 깨닫고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살도록 하십니다. 기적의 일이란 도저히 탕감 받을 수 없는 빚을 진 우리들을, 강도 만나서 남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우리들을 죄를 면제해 주시고 찾아오셔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큰 일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능하고 가치 없는 우리들이 대속의 은혜 때문에 새생명을 누리고 복안에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자기의 무능함을 알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은혜를 깨달은 자는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자신에게 있는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눌 수가 없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크게 보인다면 상대적으로 세상의 것들은 작아지고 의미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럴 때 아무런 부담 없이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크신 분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크신 분으로 자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것은 작아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만나게 되어지는 모든 사람을 자신과 같은 위치에 만나고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의 부유함이 나눠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