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 (신 26:16-18)

사람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세상에서 환영받는 존재로 살다가 죽어서도 하나님께 환영받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나님의 법칙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서로 대립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환영을 받으면 하나님 편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도 환영받고 하나님께도 환영받는 인생이 되기를 꾀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소외되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다수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수에 반항하는 것은 결국 자기 소외를 불러오는 것이라는 것을 잘알기 때문에 비록 마음속으로는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외적으로는 굴복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다수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편다면, 그 사람은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들을 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의를 세우는 것이 다수의 무리에서 소외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다수의 불의에 대항하여 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이들은 자기 스스로 위로를 만들어 내어서 다수에서 소외된 아픔을 이겨나가고자 애쓰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다수로부터 미움 받고 소외되고 핍박을 받는 것을 내가 의롭고 옳기 때문에 오는 핍박이라고 여김으로서 소외와 핍박을 오히려 자기 위안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수의 힘에 의해서 교도소에 갇힌다고 해도 떳떳하게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까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삼아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더 기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기의 이념 싸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소수가 핍박을 받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소수가 다수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모습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신자의 임무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은 교회를 개혁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를 개혁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선지자들이 당시 사회의 종교상에 굴하지 않고 죽음의 위협과 핍박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들이 종교개혁을 위한 의지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지자들을 잘못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관심은 개혁이 아니라 단지 자기 앞에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을 통해서 썩어빠진 이스라엘의 종교를 개혁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는 것만이 선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다수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죽음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자신의 의의 결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의 공통적인 조건은 자신에게 어떤 핍박이 온다고 해도 상관없이 이 모두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발생한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수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리로부터 소외되고 추방될 위험이 다분히 있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상황으로 믿고, 오직 주님만을 바르게 증거 하겠다는 것이 참된 선지자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니고, 선한 의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상황이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개입해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어떤 고통과 핍박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계획에 의해서 발생되는 상황으로 받아들일 때 핍박을 받는다고 해서 낙심하고 화낼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그것을 자신의 의로 삼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만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만 즐겁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해서 항상 부정적인 말만 한다고 해서 선지자가 아닙니다. 고통받고 어렵게 살아간다고 해서 역시 의인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난과 고통을 마치 자신의 의의 증거인 것처럼 미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난 받음과 어려움 당함과 고생하며 살아가는 것을 자신의 의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자기와 같이 수난 받지 않고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자가 아닌 것처럼 보여지게 됩니다. 이것도 역시 참된 신자로서의 모습이 아닙니다.

신자는 수난을 즐기고 고통을 즐기고 어려움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다만 예수님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하늘의 비밀이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갈 뿐입니다. 고난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려움을 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거기에 순종할 뿐입니다. 말씀이 원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전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도 두려움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말을 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에서 고난받고 소외된 것에 대해서 낙심하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이 모르는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끝나버릴 세상 속에서 영원한 하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 감사가 그를 세상 속에서 이기는 자로 남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알고 있고, 그 세계를 마음에 두고 살고, 그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고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의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과 원칙대로 시행되고 끝날 것임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끝나버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좇아가지 아니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세상을 끝나버릴 땅으로 보고 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은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노의 자식으로 멸망 받아야 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고 엄청난 은혜와 축복으로 다가온지라 스쳐 지나갈 세상의 일 때문에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성민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란 하늘 나라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 사람이 세상에서 잠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늘나라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00평 짜리 빌라와 다 쓰려져 가는 초가집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00평 짜리 빌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잠시 초가집에 살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나는 100평 짜리 빌라가 있는 사람이다. 잠시후면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잠시 동안의 초가집도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초가집에서 호의호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얼마든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초가집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은 새로운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성민이라는 것은,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분이 공짜로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얼마든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가는 신자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호와의 성민은 하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상은 초월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고 반응하는 인간이 바로 여호와의 성민입니다. 자기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죽는 것이 본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서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가는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이러한 성민으로 살아가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철저하게 세상의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서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재미없는 이상한 말로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기 전에 많은 규례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말씀하고 있는 모든 규례들은 성민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특징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맏물과 십일조도 역시 단순히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에게 바치는 것은 인간들의 주특기입니다. 바치는 것은 성령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맏물과 십일조를 통해서 '우리는 망해야 할 사람들이고 고아 과부 객과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즐거워하고 배부르게 된 자들입니다'라는 고백은 성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즉 맏물과 십일조를 통해서 누군가가 죽어야 할 우리들에게 은혜를 나누어줌으로서 우리가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성민 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에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직접 모든 세상 위에 뛰어난 자로 만드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설사 하나님이 뛰어난 자로 만드신다고 해도 순식간에 다시금 죄로 빠져 들어갈 인간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뛰어나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분이 되시고 여호와의 성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와 함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자로 여김 받고 여호와의 성민으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뛰어난 자라는 것을 세상의 시각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세상적으로 뛰어난 자는 능력이 있고 모든 면에서 월등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뛰어난 자는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약속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우습게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은혜만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다수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돈에 굴복하지 않고, 양심을 팔아서 출세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16,17절에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지금까지 모세가 말했던 규례들은 행하자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맏물과 십일조 되시는 예수님이 은혜를 나누심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과연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규례들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의지와 사고방식으로 실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러한 규례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또 가나안 땅에서 그대로 지키고 행하라고 하십니까?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규례는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랑의 나라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어질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러한 규례를 통해서 장차 메시야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나라에 대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즉 인간은 지키고 행할 수 없는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이 안고 있음으로 해서 이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행할 수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고아와 과부와 객과 같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나누어주심으로서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받게 하시고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에 매이지 아니하고 약속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일단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향한 모든 가능성이 포기되어져야 자기 말고 제 삼자를 향해서 눈을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망해야 할 죄인이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받고, 여호와의 성민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시고 행하시고 완성하심으로서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받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분이 되신 예수님이 맏물이 되시고 십일조가 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나누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맏물은 뒤의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맏물의 뒤에 난 것은 맏물이 아니면서도 맏물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배로운 백성이 될 수 없고, 여호와의 성민이 될 수 없으면서도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받고 성민이 될 수 있었던 신비이며 기적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오직 오늘날 약속의 땅인 성령 안에 살아가게 된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알게 된 자는 참으로 복된 자라 할 수 있고, 이 복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우습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는 자연적으로 사랑의 흔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님의 마음인 성령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 은혜를 나누는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민이라는 복된 신분을 망각하고 산다면 그 마음은 이웃을 향해서 닫힌 마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뛰어난 자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그 사람에게서는 하늘의 복을 아는 넉넉한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모습이 보여지게 됩니다. 내 스스로 뛰어난 믿음을 가진 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분을 의지하고 있고, 그 분이 자기에게 매이지 아니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 분 안에 있는 신자 역시 자기에게 매이지 아니한 사람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매이지 아니한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보여주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늘의 복을 아는 자로서 세상에서 구별된 뛰어난 인생을 살아갈 수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