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28:1-14)

신자가 '성경을 안다'라고 할 때 앎의 의미는 성경에 대한 지식의 차원에서의 앎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의 앎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스스로 계시하신 책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시각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안다' '성경을 이해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해가 되어진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성경을 대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안다. 나는 성경을 이해한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고 성경에 대해서 배워가면서, 창세기가 어떤 책이고 출애굽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며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이고 야곱의 12아들의 이름과 예수님 제자들의 이름을 줄줄 암기하고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성경을 안다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어지기 전에는 결코 앎은 앎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앎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앎에 대해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 각자 나름대로의 앎이 형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학문이 될 수도 있고, 과학일 수도 있으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지혜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앎은 분명히 배움과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앎일 것입니다. 배움과 경험이 없이는 앎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앎의 범위는 자기 삶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즉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만큼만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나의 배움과 경험을 뛰어 넘은 또 다른 배움과 경험, 즉 앎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앎을 참된 것이고 진실된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 안에서의 배움과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자기의 앎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오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각각 다른 앎의 차이에서 다른 이해와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견해차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시각의 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말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앎의 차이 때문입니다. 앎의 차이, 즉 견해와 시각의 차이가 있을 때는 비록 상대방이 내 말을 이해했다고 해도 결국 말을 한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해를 하게 됩니다. 말을 한 사람은 자기의 견해와 시각에서 말을 했고, 듣는 자 역시 자기의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들었기 때문에 말을 한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쉽게 각 지방에서 쓰이는 용어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코미디에서 우스개 소리로도 많이 하던 말인데, 남자가 여자에게 '만나자'는 말을 할 때 보통 지방에서는 거절의 말로서 '싫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경상도 사투리에는 싫다라는 의미로서 '언제예' 또는 '어데예'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제가 경상도 사람이 아니어서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 틀리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만약 경상도 남자가 아닌 다른 지방의 남자가 이 말을 듣는다면 언제 만나자는 것이냐, 또는 어디에서 만나자는 것이냐라는 말로도 들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러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각기 다른 지방이라는 환경에서 형성된 시각과 견해에서 발생한 오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오해를 풀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상대방의 말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한 당사자의 의도와 마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의 시각과 견해에 이러한 오류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오로지 자기 시각과 자기 견해로 형성된 자기 앎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삶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와 착오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오류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의 앎을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앎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시각과 견해에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과 견해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시각이며 하늘의 견해입니다. 하늘의 시각과 하늘의 견해가 성경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어진 것인데, 그것을 하늘이 아닌 땅의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대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한다면 과연 바른 해석과 이해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견해를 가지고 멋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경험한 그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땅이라는 환경 속에서 형성된 우리들의 시각과 견해에 맞는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땅의 상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분명 오류를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역시 인간들이 많은 오류를 만들어 내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복에 대한 개념은 무엇입니까? 즉 세상은 복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분명 땅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높아지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 상태를 복으로 이해합니다. 즉 인간의 탐욕이 충족되어진 상태를 복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복을 자기 자신의 팽창과 번성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서 배우고 경험한 앎을 가지고 복을 대했을 때 나오는 답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것을 정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세상 경험과 앎을 통해서 나오는 복에 대한 개념을 벗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하늘의 개념에서 말하고 있는 복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복을 자기 팽창과 자기 번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세상의 공통적인 시각이며 이해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은 전혀 다른 의미의 복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앎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복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까? 거의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조건으로 말씀에 대한 순종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즉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리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잘만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최초로 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창세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창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라 일곱째 날을 복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신 것도 일곱 째 날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곱 째 날을 복주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복과 거룩과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일곱 째 날이 복된 것은 말씀의 완성을 담고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 역시 말씀의 완성 안에서만 안식이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말씀이 세상에 그대로 유지되는 것에 있고, 그 상태가 곧 거룩이며 하나님이 안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째 날을 복주셨다는 것도 특정한 한 날에 대한 복이 아니라 말씀이 완성된 상태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중점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이 복을 함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말씀대로 존재할 때 말씀이 함유하고 있는 복이 세상에 확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창 1: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는 말씀도 인간에게 세상에서 팽창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세상에 팽창되고 번성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확산되는 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복의 상태란 세상에서 인간이 팽창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팽창과 번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말씀에 복을 주셨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씀을 순종하면 네게 복이 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복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 그것이 바로 복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서 무너진 말씀의 세계를 다시금 회복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며 열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복의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신나는 말씀입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몸의 소생과 토지 소산과 짐승새끼 우양의 새끼도 복을 받고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치는 모든 대적을 다 물리치신다고 하고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아니하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신나는 복의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어느 한구석에서도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도록 복으로 가득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바라고 원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이 자신에게 와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세상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인된 우리들의 탐욕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관심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이 세상에 확산되고 팽창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이 이뻐서가 아니라 말씀이 확산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을 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에 순종한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에 말씀에 순종한 인간이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세상 인간은 아무도 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목사가 자기 집을 심방에서 복을 빌어주면 그것이 복이 될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복이란 누가 빌어준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에게만 주어질 뿐입니다. 헌금한다고 복이 오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봉사했다고 해서 복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헌금과 봉사 예배하는 이런 것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이런 일에 열심이었던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 것입니까?

때문에 우리 중에 아무도 말씀에 순종한자가 없다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오늘 본문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누가 말씀에 순종했는가?'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말씀이 완성된 그 자리에 복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완성된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자리이며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완성된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완성하셨습니다. 즉 인간에 의해서 무너진 말씀의 세계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서 회복되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일곱째 날에 주어진 복과 거룩과 안식이 모두 예수님 안으로 흡수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복이며 거룩이고 안식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이고 복과 거룩 역시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기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복이 되는 것을 예수님이 아닌 전혀 다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거룩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고 안식일 역시 예수님이 아닌 한 날을 통해서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팽개쳐 버린 채 온통 자기 생각과 자기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난도질 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대 교인들은 복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좋겠는데, 아예 덫에 걸려 있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캄캄합니다. 덫이라는 것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 놓는 것입니다. 덫에 짐승이 걸려들게 하기 위해서는 짐승이 덫에 걸릴만한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매력은 먹을 것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짐승은 덫은 보지 않고 먹을 것만 봅니다. 그리고 덫에 걸렸으면서도 덫에 걸려있던 먹을 것을 먹느라고 자신이 덫에 걸린 것도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복이라고 하는 덫에 걸린 현대 교인들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번성하고 팽창되는 것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복은 덫이며 복이 제공하는 세상 것은 훌륭한 미끼입니다. 시 69:22에 보면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밥상과 평안이란 모두가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밥상과 평안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올무가 되게 하고 덫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 앞에 올무, 덫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우리들이 가장 원하는 것으로 우리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밥상과 평안이라는 올무와 덫에 걸린 채, 그것에 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것만 주면 원이 없다고 외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이 복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늘의 복은 그저 육신의 복에 덤으로 갖다 붙여진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혼이 잘된다는 말보다는 영육간에 잘된다는 말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바라는 것은 육신의 잘됨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스라엘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말씀에 대해 실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이 아니라 14절부터 말하고 있는 대로 저주에 놓인 상태가 되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말씀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만 복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은 저주 아래 놓인 우리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복은 성령이 임한 자로서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알게 된 신자들은 더 이상 기존의 자기 경험과 자기 배움으로 채워진 앎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경험이나 배움을 통해서 이루어진 자기 시각은 거짓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경험한 자기 죽음, 자기 부인의 시각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성경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을 복으로 여긴다면 세상에 대한 욕심은 자연히 적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욕심을 복으로 알고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자랑하고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는 식이고 남이 받은 것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불평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복이라는 덫에 걸려 살아가는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실태입니다.

복의 세계는 말씀의 세계입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말씀이 어떤 유익이 되었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내가 돈을 얼마 벌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세계가 내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 참된 복임을 아신다면 더 이상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마시고 다만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