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5) (신 33:12-17)

인간은 항상 자신이 몸담고 있는 환경과 처지에 대해서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능하면 못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 부위를 뜯어고치는 성형수술처럼 인생도 뜯어고치고 싶다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성형외과가 잘되는 것처럼, 아마 인생을 고쳐주는 병원이 있다면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인생을 고쳐보고 싶어서 사람들이 찾는 곳이 있습니다. 무슨 철학관이라든지, 무당집, 무슨무슨 동자라고 하는 점 집들, 이런 곳들이 인간의 인생을 담보로 해서 돈벌이를 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들이 십자가와 원수된 것이라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찬란한 인생만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사탄에게 내 영혼도 팔 수 있고, 천국이라는 것도 포기할 수 있다는 기질만 내보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땅의 영광과 땅의 것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 인생에 모든 목적을 두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빌 3:18절에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까? 십자가의 원수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2천년 전에 예수님을 로마인에게 넘겨준 유대인만도 아니고 예수님을 창으로 찌른 로마 군병만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땅의 자랑과 영광과 자기 배를 채우는 인생의 목적을 포기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예수님의 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적에게 있어서 영원한 천국이라는 미래는 절대로 보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적'이랄지 '십자가의 원수'란 말에 대해서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곧 그리스도의 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신자를 찾기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마치 천연기념물을 찾는 듯한 느낌입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을 고쳐보고 싶은 열망을 가지는 것은, 세상 영광과 세상에서의 자기 장래성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과 이유가 이토록 예수님의 정신과 다르니 나오는 것은 한숨이고 남는 것은 눈물이고 주름살입니다. 장래의 불확실함이 두려움과 근심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항상 힘들고 괴로울 뿐입니다.

인간은 인생의 눈물과 괴로움을 환경 탓으로 돌려버립니다. 환경이 좋지 않아서 힘들고 괴로운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사람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예수님이 마치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고 인생을 개조해주는 '인생 서비스맨'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덜어내 주고 가볍게 만들어 주는 '도우미'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셨던 것처럼 살아가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사신 것처럼 산다면 '무거운 인생의 짐'이라는 것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짐이 없어진다고 해서 나에게 짐이 되는 환경 자체가 바뀐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환경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짐을 짐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영광 포기입니다. 포기하되 죽기까지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항상 다른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포기함으로서 짐이 짐되지 않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보다는 자기 일이 잘됨으로서 환경이 개선되고 그로 인해서 짐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가 주님의 일로만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같이 죽자던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항상 내 인생에 영광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만한 일만 들고 오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같이 죽기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은 기피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영광에 매어 사는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쉴새 없이 진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나를 도와주는 그리스도일 때 진리이지 자신의 영광과 자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리스도는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된 자의 생각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참된 진리를 내버립니다. 천국을 말하면서 참된 생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가득찬 것이 바로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들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은, 세상을 판단하는 시각 자체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즉 축복을 바라보는 시각, 저주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치관의 다름에서 나타난 결과는 충돌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된 자는 세상에서 자기에게 영광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는 모든 것은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축복과 저주를 육신을 중심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자기 영광과 자랑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만 원하고 또 벗어난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에 영광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만한 것만 찾고 추구하는 세상에서 신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를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한 힘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세상의 영광과 자랑거리를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저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도 역시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신자들에게만 생명의 말씀으로 남을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결코 인간의 생각과 기준에 의해서 정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주라고 하신 것이 저주일 수밖에 없고 복이라고 하신 것이 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과 저주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치관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복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먼저 12절에서 베냐민의 복을 말합니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는 것이 베냐민에 대한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복을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말입니다.

베냐민을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장차 되어질 베냐민의 일에 대해서 말한 내용은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말을 비추어 볼 때 베냐민은 도저히 여호와의 사랑을 입을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로 바뀌었고 여호와의 보호를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주의 상황이 축복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베냐민이 복을 받게 된 이유를 베냐민 안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 요셉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요셉을 형제 중 구별한 자로 말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구별하셔서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요셉 개인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서 구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요셉 개인에게는 죽음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형제들로 인해서 인생이 엉망이 되버린 자가 바로 요셉입니다. 야곱에게는 죽은 자로 되었고, 형들로 인해서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종으로 지내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던 자가 요셉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로 알게 되었습니다. 즉 요셉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잘했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쓰여진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내세워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살 수 있는 방식은 희생이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즉 앞으로 이스라엘은 '희생'으로 살아가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희생한 자 때문에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의 정신은 이스라엘 속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건지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을 합니다. 자신들에게 부가되어진 고초가 모세와 아론 때문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그냥 애굽에서 살도록 가만히 놔뒀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괜히 자기들을 구출한다고 바로의 비위를 상해서 더 큰 고초를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거꾸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겐가 매어있는 상태를 가지고 축복과 저주로 보기보다는, 육신을 중심으로 축복과 저주를 분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건지실 때, 흠없는 어린양의 대신 죽는 죽음으로서 그들을 죽음의 세계 밖으로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대신 죽는 희생이 없이는 죽음의 세계 밖으로 탈출할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복의 상태는 애굽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몸이 애굽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축복이 아니라 애굽이라는 세계의 틀 자체를 벗어버리는 것이 축복입니다. 애굽이 저주라는 것은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애굽은 죽음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나라인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벗어버리고 어린양의 피로서 새롭게 형성된 그 나라에 소속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를 근거로 할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오직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그들 안에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이스라엘을 살리신 이유도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냐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역시 베냐민이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요셉의 희생을 중심으로 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냐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요셉의 희생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베냐민을 보호하시고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는 이유도 베냐민이 요셉의 희생으로 살아난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이란 인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희생의 피를 중심으로 그 피에 소속된 것만을 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희생의 피 안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 16:25-26절에 보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온 천하와 생명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온 천하를 얻겠느냐 아니면 생명을 얻겠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얻겠습니까? 참으로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온 천하는 우리에게 무한한 영광과 자랑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생명이란 말 그대로 생명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 산다고 해서 누군가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대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꼬리표가 끈덕지게 따라붙을 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별 재미없는 생명을 포기한 채, 많은 것을 보장해주는 온 천하라는 것에 마음 뺏긴 채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저주의 상태입니다. 이 저주를 저주로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생각이 바뀐 사람이고,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애굽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생명이라는 복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복은 구별된 자로 부름 받고 희생했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누가 계십니까?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대속한 자로 우리들 사이에 오신 예수님이 곧 우리들의 복입니다. 우린 예수님 덕분에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김 받은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에서 생명이 너무나 무가치한 대접을 받다보니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무가치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노래하고 귀하게 여기고 찬양하는 무리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이 복의 무리인 것입니다.

'생명 그까짓것'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비록 축복을 저주로 여기고 저주를 축복으로 아는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라든가 십자가라는 것이 아무런 필요가 없고 가치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무한한 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는 첫 수송아지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민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셉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이라는 인간을 가리켜서 한 말이 아니라 요셉이 보여줬던 이스라엘을 위한 희생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생의 정신은 힘없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들소의 뿔같이 힘이 있고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고 에브라임의 만만과 므낫세의 천천과 같은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힘과 영광을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입니다. 세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 것이 영광일 수 없습니다. 오직 가치 있는 것은 하늘의 것으로 보기 때문에 영광된 것은 하늘의 생명일 뿐입니다. 이러한 가치관과 의식으로 달라져서 산다면, 그것으로 이미 복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세계 안에서 축복과 저주가 뒤바껴버린 사실에 대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압제 아래서라도 육신이 편안한 것을 원했습니다. 그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죽는다 할지라도 애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택한 백성은 약속의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나라가 아닌 나라에는 오직 저주라는 법칙만이 통용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보다는 몇십형 짜리 으리으리한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고, 대속의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좋은 옷 입고 좋은 자가용 굴리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보다는 육신이 잘되는 것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을 더 귀한 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 본래 마음으로는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뻐할 수 없다면 그 상태가 곧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운명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저주와 축복을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서 나 자신이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난 운명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운명이 바뀐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입니까? 생각이 바뀐 사람이고 가치관이 바뀐 사람입니까? 세상이 좋아하지 않는 십자가를 좋아하고 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기를 소원하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행복자입니다.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행복자라고 말합니다. 행복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으로 주어진 구원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고 생명의 세계로 옮겼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는 분명 여호와의 구원만으로도 행복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자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힘이요 기쁨입니다. 과연 행복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