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실체 (신 5:22-33)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간다'라는 말이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고 반발심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때가 많습니다. 인간이 못돼서도 그러겠지만 믿음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턱대고 예수 믿는다 하고 죽으면 자동적으로 천국가게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통념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으로 통하는 문은 너무 좁고 또 우리 스스로는 그 길을 찾을 수도 없고 갈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제 마음인 듯합니다.

종교는 '신은 존재한다'로 시작합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신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 신을 찾아서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종교입니다. 신을 찾고 싶고 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초월의 욕망입니다. 신을 찾아서 만나기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단번에 이루질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초월할 수 있고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 잡혀서 신을 부르고 신을 찾고 신께 나아가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노력과 열심이 신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노력과 열심을 자신의 종교에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종교란 옆구리에 차고 있는 술병과도 같습니다. 기쁠 때 꺼내서 한잔함으로 기쁨을 자축하고, 슬플 때도 역시 한잔하면서 슬픔을 달래고 자신의 괴로움을 잊어버리는 술의 역할을 종교가 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기쁜 일이 있으면 신에게 감사하면서 자신의 기쁨을 자축하지 않습니까? 슬픈 일이 있으면 신을 찾아서 원망하고 하소연을 하면서 슬픔을 달래고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인간이고 종교를 선택했을 때 종교가 자신의 절대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절대화되기 위해서 종교를 선택할 뿐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더욱 굳건히 서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종교인 것입니다. 이들은 종교를 선택할 때부터 이미 내세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내세는 종교 속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종교를 선택하면 그순간 이미 내세의 모든 문제까지 해결되어 버리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 역시 이런 종교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이 교회를 대하는 모습이 어떠합니까? 옆구리에 찬 술병처럼 여기지 않습니까? 목사의 강단에는 자신의 기쁨을 자축하는 감사의 봉투들이 끊이지 않고 올라오고, 기도 소리 속에는 자신이 절대화되기 위해서 신을 찾고, 슬픔 속에서 신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가득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란 종교를 선택한 순간부터 이미 천국이라는 구원의 문제는 해결되어 버린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찾아갈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생명나무로 막혀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로 갈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 11:33절에 보면 하나님께 가는 길은 막혀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막혀 있는 길을 인간이 무슨 수로 뚫고 들어갑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신다면 절대로 여러분 마음대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다리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내 정성과 열심을 앞세워서 다리를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만든 다리는 결국 여러분을 멸망으로 빠뜨리게 할뿐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다리는 모두 성수대교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 11:45절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시 거룩해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은 거룩과 통합니다. 따라서 거룩 되지 못한 것은 거룩 앞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과연 우리는 거룩합니까? 무엇으로 거룩의 여부를 판단하겠습니까?

거룩이란 인간의 상상으로 제멋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말씀 드리면서 십계명은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니라 우리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잣대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으로서 우리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세상의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의 의를 드러내거나 자랑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잣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인간은 거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십계명으로 증명되었고,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이 발각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거룩해지기 위해서 온갖 윤리와 도덕을 등장시켜서 의를 제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롬 11:32) 스스로 순종해서 하나님께 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다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물론 말로는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죽어야 할 존재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다시 살았다'고 하면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서 행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살았다는 것은 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아는 것이 산 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죽어야 할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에 자신의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생명의 길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이고, 곧 생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의 실체를 모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천국에서 끊어진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천국을 탐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시작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부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인간은 생명과 단절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생명과의 단절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저와 여러분도 물론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이 단절이 다시 이어지고 회복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마음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창조되어지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용서를 값싸게, 그리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용서를 일방적으로 선포함으로 인해서 교인들을 이중 인격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사탄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중 인격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6일간 나쁜 일 해도 주일에 교회 와서 용서를 구하면 예수님의 피는 나의 용서 구함을 거절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차가지입니다. 설교할 때는 섬김을 말해도 설교를 마치면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용납하시고 신자로 인정하십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다시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받았을 때의 태도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계명을 들었을 때 태도는 '예,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실체에 대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26절에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합니다. 이들은 육신을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을 만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나니 나는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았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나오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은 인간이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죽음의 현장 속에서만 발견되어 질뿐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그 운명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말씀만으로도 자신들의 죽음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음성도 직접 들을 수 없음을 알고 모세에게 대신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서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스라엘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를 옳게 보십니다. 28절에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라고 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옳게 보시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죽음의 실체를 깨닫고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대신 하나님께 나가서 말씀을 듣고 전해줄 중보자를 구하는 그 마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마음인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수많은 믿음의 대상 가운데 한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가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앞에는 너무나 많은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인간들 스스로 많은 다리를 만들어 놓고 이 다리가 안되면 저쪽 다리로 건너보겠다는 심사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되면 성경 보는 것으로, 성경 보는 것으로 안되면 헌금으로, 헌금도 안되면 봉사하는 것으로라도 해보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은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닫힌 문을 자기가 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와 봉사와 열심으로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닫힌 문은 주님만이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지 않는 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닫혀 있는 문을 우리가 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주제를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맛볼 수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성공에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노력과 열심에 가능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에만 모든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것을 보장하는 거짓된 약속보다는 십자가 안에서의 생명을 보장하는 참된 약속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분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29절에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행동이나 의식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라고 합니다. 이같은 마음이란 육신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음을 알고 대신 하나님께 나아갈 중보자를 앞세우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오늘날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신자는 결코 자기 것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하나님은 인간들의 정성과 열심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내쪽에서 뭔가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안될 때 근심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함이란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을 기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 때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신 일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내 편에서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이것은 신앙이 아니며 늘 무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해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을 인간이 직접 찾아갑니다. 그리고 신을 찾아가기 위해서 온갖 종교적인 의식과 열성을 드러냅니다. 인간과의 사이에 막혀있는 신이 아니고 열려있는 신입니다. 누구든지 정성과 열심만 있으면 신께 나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세상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만든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같이 인간 스스로 신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계시되어 있는 기독교는 중보자를 내세웁니다. 인간은 그리스도 뒤에서 죽어야 할 내가 저분 때문에 살고 있음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진 것을 가지고 신약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지 일회성으로 규정짓는 사단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있다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 없는 분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신이 고생하고 죽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죽음을 생각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고난주일이지 않습니까? 지금의 고난주일은 다만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생각해주는 제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무 심하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되느냐?' '지금 교회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있는데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느냐?'라고 반박하고 싶으십니까? 심한 것도 아니고 제가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기에 다른 길로 가지 말라고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보자고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만 바라봅시다'라고 말하면 인정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교회를 바라보지 맙시다' '자기 기도를 바라보지 맙시다' '자기가 헌금한 것을 바라보지 맙시다' '십일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덧붙이면 기분 나빠하고 마음 불편해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실상은 자신의 힘과 노력과 열심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당신에게 이르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27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뿐임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뭔가 보태고 뺄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모습입니다.

33절에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 말씀은 지금껏 수차에 걸쳐서 말씀드린 대로 법을 하나하나 실천하라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가령, 사람들은 착하고 선한 사람을 가리켜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법을 철저히 잘 지키기 때문에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법을 지키느냐 안지키느냐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 사람의 성품이 이미 법을 충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품을 보고 말하는 것이지 법의 실천 여부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으로 이미 법을 충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을 충족한다는 것은 무엇을 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교가 아니라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것은 바로 이런 사람되기를 원해서입니다. 헛되고 부질없는 것에 힘쓰지 마시고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