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시는 하나님(출 19:7-15) - 14강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믿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모두 여호와께서 거부하시고 인정하지 않으시는 믿음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과연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위에 세워진 믿음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가? 질문이 너무 애매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죽이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살리시는 분이십니까?
사람들의 신지식은 신은 인간은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신의 의무라고 합니다. 대신 인간편에서는 신에 대한 정성과 성의를 보여주면 된다고 합니다. 즉 정성과 열심이 있는 자는 잘 보살펴주는 것이 신의 당연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런 신 개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단체 안에서 신의 이름을 부를 때 과연 어떤 바램으로 부르겠습니까? 그것은 보나마나 뻔합니다. 모두 자기 인생에 대한 보장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해로운 길로 인도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잘못돼도 나만큼은 잘돼야하고, 다른 사업체는 다 불경기라도 내 사업체만큼은 발전해야 하고, 다른 교회는 작아도 내 교회는 커야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고 엉터리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를 신앙의 울타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 신자로서 내 할 일은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언제나 자기를 살려주고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자기를 죽이는 하나님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양속의 땅에 이르기 전에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죽이시는 하나님입니다. 누구를 죽이십니까? 산을 범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산은 하나님이 계신 산입니다. 그 산을 마음대로 범한 자는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만나는 자는 누구든지 죽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고 말을 합니다. 특히 선교단체가 말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한낱 죽어야 할 인간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뭘해도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고 안해주고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자기들을 죽이시는 분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고 계신 것만 생각하고 기분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지킬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무엇을 알게 됩니까? 자기들은 깨끗함을 입어야 할 더러운 존재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무서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10절에 모세에게 백성을 성결케 하고 옷을 빨라고 지시하신 것이 옷이 더럽다는 얘기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더러운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설 수 없는 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 생활은 자기들의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가 얼마든지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신앙의 행위는 모두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와 기도안하는 자를 구분하게 되고, 봉사하는 자와 봉사하지 않는 자를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면 그러한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고 헛된 일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안다닌다고 해서 미워하시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반겨주시는 분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두가 죄인으로 출발합니다. 교회를 나와도 죄인이고, 안나와도 죄인입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같은 죄인이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안하는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생각을 모두 버리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을 좇고 있는 삶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훌륭한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보신다면 인간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한 행위를 자랑스럽게 꺼내놓을 수도 없고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를 날마다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무조건 살려주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하나님의 아들을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시고 우리에게 살길을 제공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 앞에 나와야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 여러분은 어디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있습니까? 언제나 자기의 성공과 행복에서 사랑으로 찾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를 붙들면서 믿음의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죽이신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무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서우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대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움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멸시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두렵지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세상일에 근심하고, 염려합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이적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데 그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는 것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놓을 정도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이시라면, 그 사랑을 아신다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 사랑만으로는 만족 못하겠다는 얄팍한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십자가가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나에게는 반갑지 않다는 고집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가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러운 것에서는 더러운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것도 더러운 것이지 깨끗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선한 행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아야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하신 십자가의 일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려고 하십니다(6절). 제사장 나라란 제사장의 희생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는 나라입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는 희생의 의미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죽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며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로서 계명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깨끗한 분과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더러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끝까지 자기의 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