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보호(출 21:1-6) - 16강

고린도전서 2:12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즉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임의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모든 것은 안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힘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다는 것은 우리가 제아무리 성경을 배우고 연구한다고 해도 은혜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연구를 통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를 통해서 알아가는 것은 성령이 있는 자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알아간다는 것이지, 연구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를 알게 하는 수단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기적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혜가 아닌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이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된 은혜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은혜를 깨닫게 된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 외에 다른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은혜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세상의 것이 없어도 오직 은혜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뭔가 세상의 것이 부족해서 기도로서 채우고자 한다면 그것이 과연 은혜만으로 만족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은혜를 안다는 것은 세상 것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인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는 그 어떤 것을 가져가셔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인간들의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보이면 나도 그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느껴질 때, 예를 들어서 집안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든지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하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가셔도 흔들림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 것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이런 사랑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모습을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법칙을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그 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린 지난 시간에 십계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십계명은 크게 나누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모습이 이웃을 통해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시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랑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해서 23:9절까지 보면 집안의 종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웃과의 관계와 사회의 여러 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규례가 십계명 다음에 나오고 있는 것은 십계명의 정신을 구체화 시켜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십계명과 또 다른 계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십계명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그 모습이 이웃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법적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규례나 22장까지 나오는 모든 규례들은 단지 실천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이고, 날마다 그 은혜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이런 이웃과의 여러 가지 문제를 통해서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땅에는 은혜를 제대로 아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규례를 통해서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종에 대한 규례입니다. 종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20:2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해 냈다고 합니다. 때문에 종을 해방한다는 것은 자신이 종되었던 몸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종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세상적인 이치로 볼 때는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종이란 자신의 소유물입니다. 재산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종을 자유케 하면 분명 재산상의 손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도 종되었다가 은혜로서 구출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종에게 자유를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여종으로 아들에게 주었으면 그 여종을 딸로 여겨야 하고, 여종을 자기 아내로 삼았다가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도 그 여종을 버릴 수없고 계속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종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종을 평등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대한 규례인 것입니다.

신자가 모든 이웃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도 이웃과 같은 처지로 볼 때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는 결코 평등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다르고, 직분이 다르고, 집안 다르다는 생각이 있다면 상대방을 자신과 차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은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신분에 있을 때, 죄의 종으로 있을 때 주어진 것인데 은혜를 안다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달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몸에 상처를 입혔을 때와 손해를 입혔을 때도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이웃에게 손해를 입힐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손해를 갚아줌으로 다 끝났다가 아니라 이웃의 소유까지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는 것과 고아나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는 규례입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는 대표적으로 약한 자입니다. 이들을 보호하라는 것도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는 나그네요, 고아와 과부 같은 그런 처지였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고아 과부를 해롭게 하고 나그네를 압제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네 아내가 과부되고, 네 아들이 고아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줘도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시고, 이웃의 옷을 저당 잡아도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이 모두가 가난한 자, 약한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시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단순히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랑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있게 하신 약한 이웃을 통해서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규례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규례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모두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다 포기하고 살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부족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서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까 말씀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 다 포기해 버리고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만 감사하며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부담이 되고, 어렵다고 느껴지거든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뭔가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아십시오. 사랑은 '세상 것 다 잃어도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기뻐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약한 자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약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약자 편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나에게 있는 힘 때문에 약자 앞에서 강자로 나타난다면 하나님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재산 다 버리고, 고아되고 과부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무엇이 있든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오직 주님의 은혜가 살 수있다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다고 해서 '나는 이 돈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라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외치는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살게 되고, 약자를 무시하고,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무시하고, 약자를 무시하는 것을 보니까 지금껏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교회 나오고, 봉사하고, 헌금했던 모든 것까지 사랑없이 했던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흉내는 냈지만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고, 자기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조금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돕는 것은 내가 그 이웃의 처지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처지가 곧 내 처지다'로 출발하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이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도 죽을 죄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종을 자유케 하는 것이나, 고아 과부를 도우라는 것은 모두가 '너도 종이었고 고아고 과부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를 아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종의 자리에서 고아와 과부의 자리에서 이웃을 대하는 것이 곧 사랑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힘은 남에게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상대방보다 뭔가 더 나은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을 도구 삼아서 상대방을 자기보다 못한 자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인데, 자기에게 있는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종으로 고아와 과부 같은 처지로 낮춰서 이웃을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산다면 세상일도, 교회 일도, 이웃과의 관계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아직까지 나를 포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고,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신앙생활도 부담되지 않습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사랑이 나를 말씀으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도 신자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서 일어납니다. 신자와 신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교회를 나오고, 자기를 사랑하며 이웃을 대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이웃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행동하는 여러분 자신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고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을 주님의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을 무시해버리고 내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고, 교회에 관심이 없고, 내가 무엇을 해서 교회에 유익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도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 와서 예배드려주고 가면 내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인도 받은 것은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나에게만 주어진 피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 피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피를 나눈 자로서 모이는 것이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단지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곳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여러분들이 서로 사랑을 보이는 곳입니다. 형제가 은혜에서 벗어날 때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권면하면서, 혹시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나누면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도와준다고 강자가 아닙니다. 어차피 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금하는 것이나 교회 일하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같이 피를 나눈 자로서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족함이 없으니까 다른 이웃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살게 된 자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를 보이면서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