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하나님(출 24:12-18; 32:15-20) -18강

사람이 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하면 이력서라는 것을 내야 합니다. 그 이력서에는 학력과 경력을 적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고 그동안 어떤 일을 했느냐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경력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되겠는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경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만큼은 학력이나 경력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을 학력화하거나 경력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에는 대학이 유행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하는 대학이 아니라 뭔가를 가르치면 무조건 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노인대학, 레크레이션 대학, 뭐 한다하면 대학이란 간판을 붙입니다. 사회뿐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해도 무슨 성서대학이니 하면서 대학이란 간판을 내세웁니다. 교단에서 교사들을 가르치는데도 교사대학이란 명칭을 붙입니다.. 물론 대학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학력 풍조를 따라가는 것 같아서 씁쓰레할 뿐입니다.

사회는 대학을 나온 자와 나오지 않은 자에게 차별화를 둡니다. 학력을 우대하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를 마친 자와 마치지 않은 자를 차별화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사를 해도 무슨 과정을 마쳐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많이 배워서 가르치면 좋겠지만 결국 이것은 성경을 많이 아는 자가 그리스도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닙니까? 이것은 신앙을 학력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학이라는 명칭 말고 그냥 교사학교라든가, 아니면 무슨 성경공부라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뭔가 수준 낮아 보이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신앙의 경력이나 학력을 앞세우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선배 후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 교회 나온 자는 선배고 뒤에 나온 자는 후배다는 것은 세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앞선 자는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목사가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앞선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 가운데서 목사보다 더 말씀으로 사는 분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앞선 자입니다. 앞선자라는 것은 1,2,3등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사는 자는 누구나 앞선 자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목사 장로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신앙 생활을 얼마나 했느냐는 경력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을 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타내는 생활이지 어떤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왜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실천을 잘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치 시험치는 것으로 여깁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그 문제에 답을 하나하나 적어 가는 식입니다. 그리고 맞으면 맞은 것만큼 실력이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50점맞은 사람보다 60점 맞은 사람이 더 실력이 있는 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지킨 것만큼 신앙이 있는 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은 그런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하면 결국 신앙의 경력이나 실력을 따지면서 많이 지킨 사람과 적게 지킨 사람을 차별화 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살아난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평생을 하나님의 자비를 마음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자연히 자비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계명이란 바로 그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명은 우리의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어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보여지는 것이 교만일 뿐입니다. 지켰다는 자부심만 보여집니다. 이것은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원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함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법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법이 언제나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인간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되니까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실천할 수 없는 계명을 실천하려고 발버둥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계명을 지켜보겠다고 설쳐댔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하나님의 자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가능성도 없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알아야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만이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내 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인 됨을 볼 때 나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인간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마음이 없이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한다면 그 사람은 하면 하는 것만큼 그것을 자기 경력화하고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더욱 잘한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결국 위선과 외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를 쌓고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켜서 선하게 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는 자기의 부족과 무능을 아는 자입니다. 때문에 소위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며 마귀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주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계명을 우리 힘으로 실천할 수 없다면 그러면 죄짓고 잘못되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냐'라고 반문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은 죄를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실천하면 죄가 아니고 실천하지 않으면 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계명을 실천할 수 없다는 말에 반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계명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자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은 자를 바라보는 그 자리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부족과 무능을 알지 못한 자가 자기 죄를 대신 지신 분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명을 통해서 우리의 부족과 무능을 알리시고 계명을 지키지 못한 그 결과는 죽음이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께서 대신 죽을 자를 보내신 자비와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대신 피흘리신 그분의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자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를 알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는 어떤 자비를 말하는 것입니까? 24:12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율법과 계명을 돌판에 기록해서 주십니까?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라는 말씀을 보아서 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칠 것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율법과 계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계명은 앞에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또 다시 가르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32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25장과 32장 사이에는 성막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성막에 대한 규례가 중간에 나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성막이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2장을 보면 모세가 돌판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을 때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며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자기의 지도자로 여기며 따르고 있었는데 모세가 산에 올라간 후 40일이 넘어도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불안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들 생각대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과, 인간들이 자기들 멋대로 상상해서 만들어 낸 하나님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면서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 모세는 들고 있는 돌판을 깨뜨려 버립니다. 돌판을 깨뜨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화가 나서 깨뜨려 버렸다고 간단히 생각해 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화가 나서 깨뜨린 것이라면 모세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것을 마음대로 깨뜨려 버린 것이 됩니다.

돌판은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돌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내려오면 계명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때문에 모세는 돌판을 깨뜨려버린 것입니다. 돌판이 깨어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판이 십계명을 기록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잔소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돌판의 계명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돌판이 깨어짐으로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돌판이 깨어진 것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깨어지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만들어서 죄인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가능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우리가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우리가 뭘 해보겠다고 나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멋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설치는 그 자리가 돌판이 깨어지는 자리요 예수님이 죽으시는 자리입니다. 나를 위해서 주님이 죽으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비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