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자(출 33:1-6) - 24강
지난주에는 헌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헌신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 일에 열심히 하는 것이 헌신이라면 그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헌신이란 자기를 모두 태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태운다는 것은 내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사생활을 포기하고 교회에 틀어박혀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모두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뭐가 신앙적인 것이고, 뭐가 불신앙적인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헌신의 삶을 사신 분은 예수님 한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참된 레위인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참된 나실인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인간은 한 한사람도 레위인의 삶을 보여주고, 나실인의 삶을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을 증거한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레위인 되시고 나실인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중보자로 삼고 우리의 죄를 깨달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보자로 삼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의 의와 전혀 반대인 세상과는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그속에 왕이 되셔서 다스림을 받으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아닌 것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삶이 곧 헌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친척이나 혈연에 너무 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친척과 형제들에게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친척에게 형제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친척들의 요구에 순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와 반대되는 일에는 전혀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편에 서서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 곧 여호와께 헌신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보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왜 인간에게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시하시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대로 사자를 앞서서 보내어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그들이 싫어서 같이 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목이 곧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의 입장과 자기의 뜻을 먼저 내세우는 그런 족속이기 때문에 만약 의로우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들을 가만두지 않으시고 진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이 말을 듣고 슬퍼해서 한 사람도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죄를 깊이 깨달은 모습의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 부모가 죽거나 큰 일이 생겨서 온 집안이 슬픔에 빠져 있는데 어떤 식구가 자기 몸을 화장하고 보석으로 단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다면 그 사람은 가족의 슬픔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즉 슬픔 때문에 자기 몸을 단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해서 단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의의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평생 소원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꿈에라도 좋으니까 하나님을 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그 이유를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중보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보의 역할을 한 것은 법궤였습니다. 법궤가 함께 하는 것은 곧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법궤가 왜 그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그들이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법궤에 피가 뿌려지는 규례가 주어졌는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법궤가 그들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것은 헛일이었습니다.
법궤 앞에서 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야 하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법궤에 뿌려지는 피가 아니면 우린 죽은 존재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법궤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은 법궤에 뿌려지는 피의 주인공 때문에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중보자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지금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또 다시 할 수밖에 없는 이 마음을 이해하십니까? 믿음은 지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안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안다면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고, 그 마음으로 산다면 그 마음이 여러분을 주장하고 있는 삶의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중보자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에 다스림 받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또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보자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모두 진멸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로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으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생명 안에 거할 수 있는 지시사항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중보자로 영접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나도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고, 말씀이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연륜이, 신앙의 체험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어제의 신앙이 오늘의 나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교회생활을 오랫동안 해오신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싫은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일수록 이것만큼은 조심해야 합니다. 몇십년 신앙생활했다는 것이 자신의 믿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각과 고집이 자기에게 쌓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에 반대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고집이 중보자이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 특별히 드리는 말씀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 연륜에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경 지식에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체험에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에 자리하십니다. 그 마음으로 신앙생활할 때 그 사람에게는 몇십년 신앙생활 했다는 것도 부끄러울 뿐이고 헛된 세월로 다가올 뿐입니다. 신앙의 체험이라는 것도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삶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중보자 예수님을 아는 자라면 자기를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자 힘쓸 것입니다.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내 이익을 생각하고 내 생활을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내가 편해진 다음의 일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러한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중보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시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보자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중보자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상입니다. '아니 목사님, 우리가 바보입니까? 중보자는 예수님인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 자리에 다른 것을 두게요'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둘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데도 예수님과 함께 다른 것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의 연륜일 수 있고, 열심있는 기도일수도 있고, 헌금일수도 있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신의 삶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전통일수도 있습니다.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신성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중보자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나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면 세상에서 나를 돕고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나, 돈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힘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하게 되고, 돈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 마음에는 이미 중보자 예수는 자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예수가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중보자 예수 외에 가치를 두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은 교회에서 모두 추방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며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런 신자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우리를 향해서 '너는 죽은 자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생명 되신 예수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거부하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갑시다. 이것이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며 만날 수 없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복을 누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