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31강 10월 18일 설교)

고전 12:4-11  믿음과 은사


신자가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산다면 그 증거는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과 피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수님의 의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마음을 둔 신자에게서는 한 가지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기 의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예수님의 의의 이름만이 가장 존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서는 높임받을만한 의가 나올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 되는 이것이 신자가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 마음을 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과 영광을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예수님의 이름과 나의 이름, 두 이름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가 담겨 있는 주의 이름만을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은사 문제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4-6절을 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이 무엇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은사와 직임, 그리고 역사하는 여러 가지의 일들입니까? 아니면 출처입니까? 답은 후자입니다. 즉 ‘어떤 은사냐’가 아니라 ‘은사의 출처가 어디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점을 망각하고 은사에 관심을 둡니다.



성경에서 말한 대로 교회에는 여러 은사가 있고 직임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에 의해서 역사되는 일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비교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이름과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것을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는 말로 설명을 합니다.



몸에는 다양한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를 각기 따로 떼어 개별적인 가치를 논할 수 없습니다. 가령 몸에는 손이 필요하고 몸에서 손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손이 몸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눈, 코, 입, 발 모두가 그러합니다. 때문에 지체는 각기 다르지만 개별적인 가치를 따지거나 비교하면서 우열을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몸을 위해서는 어떤 지체도 쓸데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8-1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은사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은사에 차별은 없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은사를 각기 다른 차별적 시각으로 바라봄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문제가 은사를 서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이유보다는 은사가 주어진 자신에게 마음을 둠으로써 발생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은사들 가운데서 어떤 은사가 마음에 더 끌립니까? 혹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믿음, 이러한 은사가 아닌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 행하는 은사에 더 마음이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 행하는 은사가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지혜나 지식, 이런 것보다는 병 고치는 것과 같은 능력을 행하는 것이 더 신비롭고 대단한 믿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교회에는 은사 또는 성령의 역사라는 명목으로 소위 신비한 체험이라는 것이 많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하는 소위 특별하고 신비한 체험을 믿음의 증거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 신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로 인도받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남들이 하지 않은 체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이 특별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각의 변화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이 신비하고 신령한 것인가에 대한 바른 시각이 열리는 것입니다. 신비하고 신령한 것을 특별히 다른 시각적이고 체험적인 요소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12:1절을 보면 사도는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 제대로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는 은사를 믿음의 증거물로 여기면서 서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로 자기 믿음을 자랑하고 높이는 분위기에 있습니다. 자연히 ‘누구의 은사가 더 신령하고 대단한 것인가?’라는 구분을 하게 되고, 은사를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기까지 하는 심각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것은 무엇일까요? 2,3절을 보면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의 본래 상태는 악한 영에게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자기 주인이 되어 살게 합니다. 그래서 악한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오직 자기 인생의 행복을 위해 살게 되고, 자기 인생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고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을 나의 주라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래 마음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는 성령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로 말합니다. 이처럼 성령에 의해서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사도는 신비하고 신령한 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교회를 나온다면 누구나 하게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나의 주라고 하는 것은 나의 주인이 곧 예수님이시고, 따라서 자신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고난이 주어져도 예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고난에도 순종하는 것이 곧 신자고,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은 빠지고 예수님이 살게 하시는 인생만 있을 뿐이며,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길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나의 주’라는 고백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러한 고백, 이러한 믿음이 쉽다고 생각합니까? 쉽기는커녕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을 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고 신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이 신비한 일이 무엇이며, 신령한 현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신자의 눈에는 은사라고 하면서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체험적인 일들을 특별한 것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탐욕에는 은사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내 믿음을 돋보이게 하고 특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은사를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런 은사를 받고 싶어 하는 그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타인의 은사를 부러워하는 것은, 타인과 같은 은사가 없는 자신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것이고, 그 불만은 곧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기 때문에 불신앙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을 넘어서 더 갖고 싶어 하는 탐욕인 것입니다. 은사는 기능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은사를 기능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어느 은사가 더 우월하냐는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의 지체를 기능적인 시각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다고 말합니다. 즉 모든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한 유익은 지체의 유익이 아닌 몸의 유익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은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내가 더 낫다’는 비교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한 성령이 역사하는 존재입니다. 한 성령이 역사하는 신자라면 무엇보다 자신에게 마음을 두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지향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모두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믿음으로만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떤 은사가 주어졌든 은사를 받은 자신을 보지 않게 되고, 따라서 자연히 은사를 서로 비교하고 자신의 우월을 나타내려는 것은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신자로 하여금 주를 바라보게 합니다. 자신이 대단해서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병을 고친다고 해서 타인보다 더 나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방언을 한다고 해서 타인과 다른 존재가 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은사는 신자에게 예수님이 자신에게 개입하여 일하고 계심을 알게 하는 증거물인 것이고, 따라서 신자는 은사로 말미암아 자신은 부인되고 예수님을 더욱 존귀하여 여기는 믿음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사를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탐욕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발이 손을 부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발은 발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 있습니다. 이것이 지체입니다. 결국 몸이라는 관계 안에서 모든 지체는 서로를 부러워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어떤 은사도 생명의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생명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신자가 구할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나에게 역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되심을 믿으며 주를 높이고 증거하는 참된 신자로 존재하기를 소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