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9강 2009.10.4 설교)

벧전 1:8-12  믿음과 구원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만, 세상이 알고 있는 구원, 즉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의미의 구원은 굳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인간의 선과 도덕적인 삶만으로도 세상이 말하는 좋은 곳에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좋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은 영원한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단지 좋은 곳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해당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누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 높이고 자랑하는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믿음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너무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면 뻔한 질문에 대한 뻔한 답은 무엇입니까? ‘그야 자기 백성을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즉 믿음의 목적을 자기 구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믿음의 목적이 구원이라면, 믿음이 주어짐으로써 구원된 신자에게 더 이상 믿음의 역할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구원된 신자에게 남은 것은 믿음으로 힘써 살아감으로써 하늘에 상을 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천국에서 큰 상을 받아 남보다 더 좋은 천국을 누리는 것에 믿음의 최종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 역시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천국은 세상이 말하는 ‘좋은 곳’이란 개념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서도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결과는 영혼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여러분께는 지극히 당연한 말로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자로 여기기에 구원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 하나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도 구원도 우리에게는 모두 불가능한 것이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은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은 자신에게 달린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결국 믿음 생활 잘한 사람에게 구원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로 인해서 상실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사도는 8절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그 기쁨은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으로 인해서입니다. 이처럼 구원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인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그 같은 기쁨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왜 구원으로 인한 기쁨이 없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구원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믿음도 구원도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 악한 자들입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영원한 저주와 고통이 더 어울릴 뿐입니다. 그것이 인간임을 안다면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의아해지는 것이 옳은 반응일 것입니다.다시 말하지만‘죄인인 내가 예수 믿었으니 의롭게 되고, 의롭게 되었으니 천국 간다’는 것은 맞지만 그 말 안에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서 자신이 밥을 먹는다는 것으로 감격해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루 세끼의 밥을 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것까지 하나님의 은혜라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만큼 정당한 사람들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실상을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지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밥을 먹기는커녕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고통에 있어야 합니다. 주를 사랑하기 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리 자신을 본다면 정말 그것이 우리에게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떼로 몸에 병이 들게 해서 입맛이 떨어지게 하고,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게 하셔서 그동안 먹고 싶으면 마음대로 먹었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과분한 은혜였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습니까?



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모든 죄를 사면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세상에서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으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시다. 과연 사형수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까요?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사형수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사형집행이 되어서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자신에게 주어질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오늘 사형이 집행되는 것은 아닌가’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죄가 사면이 되고 자유하게 되었다면 의아해 하면서 ‘이게 웬일인가?’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신자된 우리의 심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이라는 지식에 의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감격과 기쁨이 상실된 구원을 얘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신자가 예수님의 은혜의 자리로 부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의 자리로 부름 받은 그 사람은 예수님의 붙드심과 인도하심으로 인해서 결국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르신다고 해서 순순히 ‘예’하면서 따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순히 따랐지만 당시 그들이 따라 나섰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에 성령이 오심으로써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좇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의 자리로 부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는 이미  홀로 사는 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장악하고 다스리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능력이 함께 동행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의 자리로 부름 받았다는 말은 위로와 힘과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자리로 부름 받았다면 그것은 내가 나를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라 은혜가 나를 책임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책임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을 행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도덕적인 의미의 악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인간의 꿈과 계획과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악한 것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은혜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은혜로 천국 보내준다는 것이 아니라 악한 우리를 다스리고 징계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두게 하시고 나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에 두게 하심으로써 구원에 실패가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구원에서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이 구원된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구원된 신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기쁨으로 인한 찬송과 감사입니다.



10,11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은혜는 이미 구약 때부터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은 생각하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지와 열심으로 인해 주어진 은혜입니다. 이 구원이 신자에게 영광의 즐거움으로 인한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나 자신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구원받았다’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터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구원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나의 모든 악을 덮고 계시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에 참여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높이고 감사하고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나는 무엇을 해도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즉 봉사를 하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자기 자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아는 신자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완성된 자리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루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이미 완성이라는 복된 자리에 들어와 있는 신자로서, 그 완성을 누리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자로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행함도 내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에 대한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