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3강 6월 7일 설교)

벧전 2:1-3 믿음과 성화의 관계


믿음에 있어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대개 알고 있는 것처럼 ‘믿음은 신자를 점차 변화시킨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성숙되지 않은 신자는 믿음이 없거나 약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성숙의 여부는 또한 행함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성화 또한 인간의 행함을 가르치는 논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성경의 근거는 본문 2절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구절입니다. 자란다는 것을 성숙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면서, 믿음은 신자를 성숙하게 한다고 하고 그것을 성화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엡 4:15절에서 말하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는 구절도 신자는 그리스도의 수준을 향해서 자라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성화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자라가기 위해서, 즉 성화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화되기 위해서는 화도 내지 않아야 하고, 성격도 고쳐야 하고, 인자한 표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성을 내는 것도 자제할 수 있고, 항상 인자한 표정을 하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평생토록 자신의 의지로 분노를 자제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표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 그동안 쌓았던 성화는 물거품이 돼버리는 것입니까?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성화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 본질을 생각하게 되면 성화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롬 3:10-12절을 보면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이 과연 성화될 수 있을까요? 위의 구절에 대해 사람들은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있기 전의 얘기일 뿐이고 믿음이 있게 되면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주어지면 성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대로 인간이 믿음으로 인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주어지게 되었다면,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인간이 여전히 악을 행하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악을 이길 능력도 있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악을 행할까요?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라는 말로 변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선을 행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완벽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인간의 연약함과 함께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는 인간에게 성화가 가능한 것일까요? 선을 행할 수가 있어서 성화되어 갈 수 있다는 말을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성화를 이루어 가다가도 악을 행함으로 인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성화되어 가다가 무너지고, 또 다시 성화되어 가다가 무너지는 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화의 허구성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성화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점차 완성되어 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도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붙들고 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성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자가 믿음으로 인해서 달라지고 변화되는 것은 있습니다. 믿음이 주어졌는데도 믿음이 있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인한 변화는 그리스도 밖에서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 바뀐 것을 뜻합니다.



신자에게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동안 살아오던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환경이나 형편 또한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성격이나 본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을 보고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것이 없으면 안되는 삶을 삽니다. 세상의 것이 기쁨의 이유가 되고, 원망과 불평의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 주어지면 그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의 실체와 함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해도 그리스도 밖에서의 인생은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의 것이 기쁨의 이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이유가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돈이 없으면 한숨이 나왔는데 믿음이 주어짐으로써 돈이 없어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라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더욱 굳건히 세워져 가는 삶이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가 전부인 삶이 되어가는 것이 진정한 성화며 자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행함과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성화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엡 4:31-32절을 보면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과 밖이라는 두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의 세계는 악함, 분노, 노함, 떠드는 것, 훼방이 있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인자함, 불쌍히 여김, 용서가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악함, 분노, 노함, 이러한 것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가 아닙니다. 나에게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분노와 시기와 악함과 노함을 보면서 나같은 자는 생명의 세계에는 도무지 들어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용서가 나를 깨끗하게 하고 그리스도 안의 세계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믿음으로 할 것은 시기가 나쁜 것이니까 시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죽을 힘을 다해도 나는 시기할 수밖에 없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가 나같은 자에게 얼마나 큰 은혜며 선물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용서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음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게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를 맛보아 그 맛을 알게 되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제부터 성화되어야지’라는 결단을 하게할까요?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한다면 순전하게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젖은 그들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를 맛보아 알게 되면 자신을 살리는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씀을 사모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단지 성경을 많이 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사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안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가 진심으로 구할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더욱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변화고, 이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점차 거룩해져가는 성화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애당초 우리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으로 베풀어진 은총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거룩에 차별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나를 거룩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거룩해지겠다고 하는 것은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멸시하는 것이고, 인간의 힘과 공로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겠다는 악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죄를 지으면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떠나고 복도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는 자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죄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죄에 붙들려서 눈만 뜨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죄를 보게 되면 예수님의 함께 하심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통하여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자에게서 사랑이 나타나고, 인내가 나타나고, 절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신자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이 자기 부인이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자의 성화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