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0강 2009.7.26 설교)

딤전 6:11-16  믿음의 싸움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이는 디모데에게 싸움꾼이 되어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신자는 싸움꾼입니다. 물론 주먹을 휘두르는 싸움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타인과 경쟁하는 싸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서 필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말합니다. 사도는 이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성품이나 성격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이 싸움을 하는 자로 살아가는가의 여부로 그가 믿음에 있는가를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은 신자에게는 중요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음에 거한다는 우리가 사도가 말하는 이 선한 싸움을 얼마나 의식하며 살아갑니까? 오히려 싸움을 회피하면서 자기 관리를 하는데 힘을 쓰는 것은 아닙니까?



싸움이란 복음이 아닌 것에 대한 부딪힘입니다. 이 부딪힘은 복음을 생명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필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복음과 상관없이 살아가는데, 그러한 세상에서 복음으로 산다고 하는 신자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세상에 동화되어 아무렇지 않게 산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산다고는 하지만 정작 복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싸움에는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싸움에는 믿음의 적이 있다는 뜻인데, 믿음의 적이 누구일까요? 믿음의 적을 무당이나 불교와 같은 기독교 밖의 다른 종교의 무리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들만이 믿음의 적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겉으로는 믿음의 옷을 입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의 적으로 활동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복음을 왜곡하고, 예수님을 인간을 위하고 인간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무리들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기 때문에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2-5)는 당부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보는 세상의 현실은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른 교훈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이 선한 것으로 말하는 도덕과 윤리 안에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행위로 여기는 종교적 실천을 통해서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종교적 행위에 열심을 냄으로써 악함은 감추고 대신 지극히 신앙적인 사람으로 드러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인간이 감추고 있는 악함을 고스란히 파헤칩니다. 인간이 붙들고 있는 선을 무너뜨리면서 그 뒤에 감추어 놓았던 악함들을 끄집어내어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할이며 바른 교훈인데 사람들이 이 교훈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대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전해지는 말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대신 자신을 감동시켜주고, 귀를 즐겁게 해줄 말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도는 디모데에게 참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전도인의 일이고 디모데의 직무임을 당부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부흥에도 관심두지 말고, 사람들의 반응에도 관심두지 말고, 설사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핍박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참으면서 다만 전도인의 직무만을 다 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디모데에게 있어야 할 선한 싸움입니다.



디모데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담임한 목사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목사에게 원하는 참으로 많습니다. 훌륭한 인격을 동원하여 교인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이루고, 교인들로부터 신뢰를 쌓고, 교인들이 감동 받을 수 있는 말을 해주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위해서라면 목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목사의 직무일까요? 사도는 디모데에게 그런 권고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사람들이 듣기를 싫어한다고 해도 생명이 되는 바른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디모데를 세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말합니다.



사도의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부하고자 하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일만 악의 뿌리를 안고 침륜과 멸망으로 스스로 달려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로 이 침륜과 멸망에 빠지는 길을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믿음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마음과 소원을 세상에서 부해지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된 소망을 두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부해지는 것을 하늘의 복으로 말하는 것을 어찌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내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에게 모든 마음과 관심을 두게 하는 것인데, 믿음은 선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을 어찌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다른 복음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12-14절을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명령을 지키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말씀을 실천하는 행함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도가 말하는 명령을 지키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어떤 형편과 고난의 길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결단과 의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애당초 자기 유익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로 태어납니다. 그러한 사람이 자기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며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산다는 것은 본래의 인간이 꺾여지고 새롭게 지음 받았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 안에서 신자는 어떤 고난도 개의치 않고 말씀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자의 직무는 전도를 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말씀을 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에 실패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복음을 마음에 두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개인적으로 복음을 알고 인정하면서 십자가로 감사한다고 하는 것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전도인의 직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도인의 직무는 신자에게 복음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개인적인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복음의 선한 증거를 증거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택한 자를 부르시기 위한 조치가 세상에 전도인을 남겨 두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자신의 유익을 이유로 포기한다면 그것은 곧 전도인의 직무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이미 싸움터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처럼 세상에 힘이 되는 육의 문제로 싸우는 것은 신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옛 사람의 싸움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부흥시켜서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싸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신자는 그러한 싸움에서는 벗어나서 새로운 싸움으로 돌입한 사람입니다. 그 싸움이 바로 복음으로 인한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교인수가 적다고 무시를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복음이 생명이라는 그 믿음 하나로 복음이 복음으로 증거되는 것에만 모든 뜻을 두는 것이야 말로 복음을 방패로 하는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복음은 나의 체면, 나의 자존심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증거되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이러한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고, 그 결과가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세상은 돈이 전부입니다. 목사에게는 교회 부흥이 전부입니다. 교회 부흥이 전부라고 해도 돈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 부흥은 곧 돈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결국 교회만 부흥되면 원하는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는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전부임을 증거하는 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그것이 싸움이며 여러분이 직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