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5강 2009.9.6. 설교)

고후 1:1-5  믿음과 고난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은 귀에 아주 익숙하고 거슬릴 것도 없는 말이지만 ‘믿으면 고난 받는다’라고 말하면 아마 생소한 말로 들리면서 뭔가 귀에 거슬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래 마음이고, 믿음에서 기대하는 것도 고난을 피하고 좀 더 나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으면 고난 받는다’라고 하면 믿음에 대한 자기 기대를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달가운 말로 들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에게 고난이 있다’는 말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고난을 견디면 복이 주어진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이유가 신자의 믿음을 연단시킴으로써 더 좋은 믿음이 되게 하여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의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고난 후에 두 배의 복을 받았다고 여기는 욥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믿으면 고난 받는다’라고 하면 믿음의 결과가 고난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으면 고난 받는다’는 말은 틀린 말일까요 맞는 말일까요? 만약 ‘믿으면 고난 받는다’는 말이 맞는 말이라면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과는 다른 말일까요 같은 말일까요? 복을 세상의 것이 풍족히 주어지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이 두 말은 반대가 됩니다.


하지만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복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한 믿음이고, 그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자기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살게 하는 것이라면 ‘믿으면 복 받는다’와 ‘믿으면 고난 받는다’는 두 말은 서로 다르지 않고 같은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원하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믿음을 자신이 원하는 것, 자기의 뜻의 성취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생각이 버려져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신자로 하여금 자기 뜻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라고 믿음을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 믿음은 나를 위해 사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을 다스리심으로써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붙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든 믿음이 아니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게 되는 것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선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런 자로 다스려가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필히 고난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양적인 의미에서 넘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신자를 이끌어 가는 길 자체가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의 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초부터 고난을 기대하고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은 고난이 넘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은 자기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고 또한 고난의 길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얘기하면 대개 육신적 고통과 수치를 상상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고난도 그처럼 육신적 고통이 주어지는 것으로 상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원치 않은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기 싫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셨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 자체가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실 때부터 낮은 자리에 오신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예수님을 증거할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뜻대로 살면서 예수님을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뜻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높아지는 것에 뜻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낮아지신 예수님이 증거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신자의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면서 예수님이 내 인생에 들어와 계심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은 나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나 홀로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인생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안된다는 것은 모두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내 뜻대로 안될까요?



내 생각과 계획대로라면 틀림없이 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 인생이 운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로 구분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운이 아니라 내 인생에 들어와서 간섭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이 반가운 일입니까? 사실 예수님이 내 인생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아주 귀찮은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내 인생에 들어오셔서 나를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밖에 계시면서 내가 필요 할 때 달려와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은 싫지만 따로 살면서  내가 어렵고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그런 부모가 되어주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부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갖고 있는 돈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그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믿음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싫어하는 악한 자들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순종으로 내가 깨끗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를 깨끗케 하셨음을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신자가 부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신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위로도 함께 언급합니다.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또한 ‘위로’라는 말이지만 이 위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신자에게 함께 넘치는 위로입니다. 즉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한을 풀어주는 위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말하지만 이 말씀은 환난 때문에 고생 했으니까 그 상으로 환난 대신에 세상의 풍요를 주심으로 위로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런 위로를 기대하지만 그러한 위로는 참된 것이 아닙니다.



욥이 고난을 견딤으로써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축복이 위로가 되었을까요? 욥이 나중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전에 자녀를 잃어버린 아픔이 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고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욥의 위로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신자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흔히 고난을 믿음을 연단하여 더 강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욥은 왜 고난을 받았을까요? 



욥 1:1절을 보면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욥은 믿음에 있어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 자신도 자신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힘들어 했던 것입니다.



신자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것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이 더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하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순종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인간의 순종은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순종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을 증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복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욥에게 고난이 주어진 이유도 이것입니다. 욥은 죄를 범하지 않는 자기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주어지자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정당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욥에게 고난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욥 자신은 정당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아무리 바르다고 해도 그것으로  정당한 사람이 될 수 없고 정당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난 욥은 자신의 정당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을 통해서 욥에게 더욱 풍성하게 된 복입니다. 그리고 이 복이 위로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고난의 길에서 자신에게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정당할 뿐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신자는 정당하신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들어와 계심이 말할 수 없는 복임을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풍성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풍성한 복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나 ‘믿으면 고난 받는다’는 말이 같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고난이 넘치는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신자를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길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고난의 길에서 그리스도의 복으로 풍성해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위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