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3강 2009.8.23. 설교)
고후 11:1-3 믿음과 열심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가 잘못된 끼워진다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처음 시작이 중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칩니다. 믿음의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도 처음 시작이 잘못 되면 나머지 모든 문제 역시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의 현실은 믿음의 처음 시작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믿음이 아닌 믿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잘못된 시작은, 믿음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복주고 나를 천국 보내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뜻과 계획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주어진 믿음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을 위해 믿음이 주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면 그 결과로 자신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위한 도구로 존재 하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중심에 자신을 두고, 자신을 위한 믿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믿음 생활하면 복을 받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결국 ‘열심’을 그 답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심은 당연히 인간의 열심, 자기 열심입니다. 내가 열심을 내어 믿음 생활을 하면 그것이 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지금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2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는 말을 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기 열심이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의 열심은 고린도 교회 신자를 정결한 처녀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중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 54:4-5절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기 보면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고 말합니다. 남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신부를 향해서 이 말을 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신부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면 수치를 받고 부끄러움을 당할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 54: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부는 잉태치 못하고 생산하지 못한 처지에 있습니다. 당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저주 받은 것으로 여겼기에, 여인으로서는 큰 수치가 아닐 수 없고 생명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한 신부에게서는 노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날마다 탄식과 한숨소리가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를 향해서 ‘너는 노래할찌어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노래가 나올 수 없는 처지의 신부에게서 노래가 나오게 되는 것은 새로운 남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신자가 단순히 ‘예수님은 나의 신랑이고 나는 예수님의 신부다’라는 생각만으로 기쁨의 노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신랑이라고 할 때 신부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기쁨의 노래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신부된 우리는 이사야가 말한 잉태치 못한 여인처럼 저주 받은 처지의 사람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우리가 새롭고 참된 남편을 만나서 저주에서 해방이 되고 모든 수치에서 벗어난 신부로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기쁨과 즐거움의 노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정결한 처녀에 해당이 됩니다. 예수님만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참된 남편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정결한 처녀에 해당이 됩니다.
현대인들의 즐거움과 기쁨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가 나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이 주어지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남편이라는 것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을 다른데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을 제공해 주시는 분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이 원하는 다른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결한 처녀와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배반하고 마음에 예수님을 두기 보다는 날 위해 유익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하는 다른 것을 두고 삽니다. 그러면서 그런 마음은 감추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정결한 처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정결과는 거리가 먼 우리를 정결한 처녀로 예수님의 신부로 중매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이고,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으로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를 복주어서 잘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믿음에 열심을 내는가?’ 살피면서 열심 있는 신자에게 복을 주어 그 인생을 평탄케 해주고자 일하시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를 정결한 처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정결함은 그 마음에 오직 참된 남편이신 예수님만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러한 정결함을 위해서 하나님은 죄 아래 있고, 저주 아래 있는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것이 나의 실상이라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써 저주에서 구출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케 하시는 신랑 되신 예수님의 의로 인해서 기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부의 정결함입니다.
그래서 정결한 신부는 예수님이 남편이 되심으로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물러간 것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게 되고, 나같은 자의 신랑이 되어주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신랑 되신 예수님만을 증거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결한 신부로 세우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바울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수치와 죄를 보게 하고 신랑 되신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한가를 보게 하기 위해 일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한 바울의 열심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자의 열심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은 이스라엘에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게 됨으로써 자신들을 죄에서 깨끗케 하시고 이스라엘을 거룩한 자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열심을 동원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열심입니다.
자기를 위한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음도 예수도 모두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을 내면서 자기 복을 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악을 쌓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은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쌓아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의 열심은 교회 내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활발한 활동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활발한 활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심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심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과 동일한 열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실상을 항상 마음 깊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것이 나의 실상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쉬지 않고 깨달아야 합니다. 신자의 기도 또한 이것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무너뜨리는 기도, 이 기도야 말로 자신이 부인되는 순간이고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열심히 여러분을 정결한 처녀로 예수님께 나오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는 저주의 자리에서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서 예수님의 가치는 전혀 부각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를 저주의 자리로 밀어 넣으면서 무엇으로도 구출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써만 건짐 받을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열심을 내십시오. 그러나 그 열심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저주 받은 자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받아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깊이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신랑이라는 사실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