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5강 6월 21일 설교)

살후 1:1-4  믿음의 자람


여러분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에 대해 만족한 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환상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불만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불만의 요소가 사라지고 없는 다른 현실을 꿈꾸며 사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좋은 집에 살지 못한 자기 형편에 불만이 있으면, 복권에 당첨되어서 좋은 집에서 고급차를 타며 사는 자신을 상상합니다. 그래서 행여나 하는 생각으로 복권을 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고,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멀고 돈이 가까운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상보다는 차라리 천국에서 예수님이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좋은 집에서 살아봐야 기껏 몇 십 년의 세월로 끝나지만 천국에서의 삶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신자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생각에 머무를 때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복이라는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환상은 끊임없이 세상 속의 나를 꿈꾸며 펼쳐집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실까요? 차라리 우리가 꿈꾸고 환상을 가지는 대로 채워주시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나아질까요? 아마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네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뤄 주면 평생 나만을 믿고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겠느냐?’라고 하시면 주저하지 않고 ‘예’라고 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내가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한 것은 먹고 사느라고 바쁘고 힘들어서인데 돈에 부족함이 없이 원하는 대로 살게만 해주신다면 하나님만 믿을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의 것으로 배부르고 세상의 것으로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해져야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이 풍부할 때 사람은 자신을 가진 자로 여기게 될 것이고, 자신을 가진 자로 여기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은 빈껍데기고 죽은 자임을 안다는 것인데, 자신을 가진 자로 여기는 사람이 스스로를 빈껍데기로, 죽은 자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도 단지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자신을 빈껍데기로, 죽은 자로 간주하는가에 있습니다. 즉 인간의 본질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본질을 알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추락’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인생의 밑바닥으로 끌고 가심으로써 그 자리에서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추락이 물질적인 형편의 추락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의 신분의 추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형편의 추락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만과 원망만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진심으로 밑바닥까지 추락시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의 삶이 편안해 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신자를 편한 인생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사랑이며 예수님의 동행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자기 백성을 끌어 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자기 백성을 굳이 고난으로 끌어 들이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시련과 고난의 삶에서도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믿으며 그리스도로 기뻐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로 인하여 멸망의 세상에서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보배로운 분이심이 증거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를 밑바닥으로 끌어가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본질을 바라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왜 생명일 수밖에 없는가를 절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더욱 더 주님께 붙들리는 것을 믿음의 자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믿음이 더욱 자랐다는 것은 외적인 행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믿음의 자람을 새벽기도를 하지 않던 사람이 하게 되고, 십일조를 하지 않던 사람이 하게 되고, 봉사와 헌신을 더욱 많이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자람이라면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물론 믿음의 자람에는 신자의 변함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그 변함으로 성경도 보게 되고 기도도 하고 교회의 지체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를 믿음이 자란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믿음으로 여기게 되면 결국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믿음으로 만들어 내려고 할 것이고, 참된 믿음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외적인 것은 인간이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꾸며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란다는 문제를 외적인 것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이끌어 가고 그 관계에 붙들어 놓고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의 의지로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믿음의 강력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자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내 안에서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밑바닥까지 추락한 인간의 본질에서 크게 부각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보게 되면 인간이 가지는 환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산다고 해도 예수 없는 인생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지금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나의 인생을 꿈꾸며 환상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죄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자를 신자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크신 사랑과 은혜로 다가오면서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내 마음에 확산되어 가는 것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에 대한 환상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대신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 됨으로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자람입니다. 이러한 자람은 성령이 함께 하신 신자에게서는 자연히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힘과는 상관이 없는 자람인 것입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의 믿음의 자람과 함께 사랑이 풍성해지고 핍박과 환난 중에서 인내했음을 말합니다. 즉 이것이 믿음이 자란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사랑은 인간의 친분관계가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자의 사랑이 인간의 친분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세상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친분관계는 ‘내 마음에 든다’는 것이 중요한 조건으로 자리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습니다.



신자의 사랑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형제를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건은 전혀 보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천국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죄인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모두가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만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고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람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풍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련과 환난에서도 자연히 인내하게 됩니다. 억지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과 환난에서 주님의 고난을 보게 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시련과 환난 또한 신자가 가는 생명의 길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자람으로 인해 나타나는 흔적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신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예’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이 행하시는 어떤 일에서도, 비록 그 일에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아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신뢰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벗어난 적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은 선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실패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일에 대해서도 아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람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 만난다면 서로가 예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증거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사랑이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인간의 본질로 끝없이 내려가고,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동안 자랑거리였던 세상의 것을 내려놓은 채 생명 되신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는 심령이 늘어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교회의 참된 부흥입니다. 믿음의 자람이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부흥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