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34강 2009.11.8 설교)

행 2:43-47  믿음과 교회


44절에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교회됨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 하나로 교통이 되고 부족함이 없고 나 너가 없는 관계를 교회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교회상을 따로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상을 기준으로 해서 교회의 교회됨을 평가합니다. 나누는 교회, 섬기는 교회, 구제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교회상이고 이것을 기준으로 교회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오신 이유는 제자들을 땅 끝까지 보내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받은 신자가 세상에 남아 할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나눔과, 섬김, 구제, 선교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사실 그러한 것을 말하는 이유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뜻보다는 좀 더 나은 교회,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교회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거의 전부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나눔과 섬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칭찬할 일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나눔과 섬김, 구제, 이러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면 굳이 성령이 오실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성령이 없이 인간의 노력과 도덕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나누고 섬기고 구제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의미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역할보다는 자기 교회를 증거하고 보여주는 일에 더 열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예수님이 다스리시고 예수님이 일하고 계시는 교회로 나타나고자 하는 것보다는 이상적인 교회 만들기에 집중해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마치 교회로서의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교회됨을 보여줌으로써 ‘너희도 초대 교회와 똑같이 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비슷하게 흉내라고 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흉내 내기 위해서 공동체라는 것을 설립하고 개인의 소유가 없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생활하는 곳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이 원하는 모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교회가 서로 내 것 네 것이 없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면서 자기 재산과 소유도 다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그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의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즉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믿음이지 교회가 하는 일이 교회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가 교회가 하는 일을 통해서 교회됨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초대 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한 때부터입니까?’ 아니면 본문에서처럼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이 있을 때부터입니까? 교회됨은 성령이 임했을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물건을 나눠주고 통용하는 일이 없을 때부터 이미 교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47절에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날마다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나눠주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더니 주께서 그 교회를 찾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셔서 부흥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 교회됨을 증거합시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라고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를 본받읍시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어떤 교회는 의례히 담임 목사는 많이 받고 부목사는 적게 받는 생활비를 가족 수대로 지급함으로써 가족이 적은 담임목사보다 가족이 많은 부목사가 더 많은 생활비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이고 그것이 믿음의 모습이고 초대교회를 본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사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그러한 것이 교회의 기준은 아닌 것입니다.



본문에서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줌으로써 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고 적음의 구별입니다. 46절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말하는 것도 단순히 교회 출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 기준이 된 구별이 사라지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 된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약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이 되면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합니다. 그런데 그 교제에 부정한 사람은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 신약 시대에는 부정한 사람과 정결한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부정한 존재일 뿐이고, 그 부정함이 예수님이 흘린 피로 말미암아 깨끗해 졌음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는 부정한 자, 정결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로 깨끗함을 입은 신자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믿음이 있음으로 해서 나타난 현상은 많고 적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기준이 되어서 신앙 좋은 자 신앙 없는 자의 구별이 사라진 것입니다. 소유가 똑같아 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소유의 정도는 제각기 다르지만 그것이 나와 너를 구별하는 도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생명의 문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소유가 많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되고 소유가 적다고 해서 낙심할 일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소유에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에 다만 우리의 생명이 되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만 마음을 두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통이 되고 같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신자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상적인 교회상으로 생각하면서 초대교회를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믿음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종교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름답고 이상적인 교회상을 따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교회상을 따로 생각하게 되면 그러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교회는 다만 자기의 종교적 만족을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낸 헛된 교회상일 뿐입니다. 비록 그러한 교회를 흉내 낸다고 해도 생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사단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믿음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며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따라서 신자는 바람직한 일을 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신자 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도구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소유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나누는 사고방식의 세상 안에서 인간에게 있는 소유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한 본으로 고백하는 그것이 예수님이 일하고 계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도 소유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모습을 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동일한 죄인이기에 오직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는 공동체로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일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교회됨을 보여주겠다는 것은 사단이 장치해 놓은 함정입니다. 현대 교회는 이러한 함정에 빠져서 교회의 잘못됨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교회를 위해서만 존재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구제도 할 수 있고, 선교 헌금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즉 그런 일을 통해서 교회의 이익이 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것이 곧 믿음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로 움직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