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6강 2009.4.19 설교)

행 14:8-10  구원 받을만한 믿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하여 십자가로 마칠 때 참된 교회다움이 증거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서는 믿음으로 위장된 인간의 욕망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고 따라서 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선명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시작하여 십자가로만 마치고자 하는 교회는 세상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 바라보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밖에서 교회를 바라보게 되면 ‘거룩한 예수님의 뜻’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채 믿음을 가장하면서 교회를 난도질 하고 있는 마귀의 활약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한 것이면 모든 것이 주의 뜻이고 선한 일이다’라는 사단의 생각에 함께 동조하여 미쳐 날뛰는 종교 활동만 있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종교에 빠져 버린 현대 기독교의 실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에 빠지게 되면 믿음도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는 능력으로 보지 못하고 다만 자신을 이롭게 하는 수단과 도구로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에 대한 환상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나의 모든 일이 잘된다’는 환상 말입니다. 이러한 환상 속에서 사람들은 소위 눈으로 확인되는 현상과 체험을 쫓아갑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증거로 여겨지는 병 고침이나 귀신 쫓아냄과 같은 현상들을 좇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자기 믿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용도에 불과할 뿐, 신자가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야 할 믿음의 길로는 여기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도 십자가를 외치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만이 전부가 아니라 병 고침과 같은 성령의 은사도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체험을 더욱 확실한 신앙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본문과 같은 내용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좋은 얘깃거리일 것입니다. 사도가 태어나서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한 사건이야 말로 성령이 역사한 증거라고 하면서, 지금도 성령이 역사한다면 이러한 기적이 있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과 같은 병 고침의 내용들은 과거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으니 지금도 같은 현상이 있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먼저 9,10절을 보면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소리치고, 앉은뱅이가 뛰어 걷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은 사도바울의 능력입니까? 아니면 앉은뱅이에게 있었던 믿음입니까? 분명 앉은뱅이에게 있었던 믿음이 그를 일어나 걷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앉은뱅이에게 있었던 구원받을만한 믿음에 관심이 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이란 뭘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위험성이 뭔가 하면, 구원받을만한 앉은뱅이의 믿음은 뭔가 특별하고 다를 것이라는 차별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차별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복을 받을만한 믿음이 따로 있고,  기도 응답받는 믿음도 따로 있고, 만사가 형통하는 믿음도 따로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이냐 믿음이 아니냐’라는 구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믿음에도 복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믿음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은, 사람의 행함의 정도가 각기 다른 만큼 그에 따라 믿음의 질도 차별되어야 하고, 믿음의 질에 따른 차별에 의해서 하나님께 대접받는 것도 차별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지극히 종교적인 발상에 의한 생각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만연한 간증이 바로 이처럼 믿음을 차별화 하는 주범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하지만 앉은뱅이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지만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소위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믿음은 사람을 보고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앉은뱅이를 택하시고 믿음을 주신 것뿐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설사 몸이 낫는 기적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이미 구원 얻은 자입니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이미 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앉은뱅이에게 함께 하고 계셨던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앉은뱅이에게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주어질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받을만한 공로를 쌓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초라한 사람일 뿐이고 자랑할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감사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과 같은 기적이 있어야 굉장한 믿음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도를 세워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기적을 보이신 것은, 믿음은 사람들에게 무시 받는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로 인해 믿음에 차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아님을 드러내시기 위해 일으키신 기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기적은 40일 금식기도하고, 성경을 외우고,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을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을 본 사람들의 관심이 사도에게로 향합니다. 사도의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났다고 여기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도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는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은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소리쳐도 사도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본다면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믿음의 증거물로 여기는 것 또한 불신앙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앉은뱅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면서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여러분이 일어나 걷게 되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이런 능력을 베푸셨다고 간증하겠습니까? 앉은뱅이에게는 그런 행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 같은 자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을만한 믿음에 의한 반응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행함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모든 일에서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이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인생임을 날마다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숨 쉬는 것에서까지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담겨 있음을 알게 합니다. 즉 매일 매일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받을만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한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의지와 열심, 이 모두가 오직 하나님에게로만 향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은 온 마음이 하나님에게로만 향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눈으로 뭔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없고, 자극적인 것이 없이 매일 평범한 생활이 계속된다고 해도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손길 속에서 살고 있음을 자신의 삶에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면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말합니다. 앉은뱅이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7절에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의 입에서 나올 말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있는 앉은뱅이에게서 사도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본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복음을 듣고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참된 복음에는 반드시 반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해야 그것이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도를 세워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사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도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를 바라보게 합니다.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 이야기를 거부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성경에서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하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다고 해서 복음을 거부한다면 그것이 곧 불신앙인 것입니다. 아무리 자칭 신앙인이라고 해도 구원과 상관없는 신앙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마 11:4-5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기적들은 오직 예수님의 권세로만 가능한 것들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기까지 하는 기적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생명의 권세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굉장한 기적들 속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명의 권세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께 복음이 전파되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권세를 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또 다른 무슨 체험과 현상이 필요하겠습니까? 신자는 다만 나를 일으키시고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만을 바라보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을만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