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35강 2009.11.15 설교)

행 15:1-5  믿음과 율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신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오직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이 말은 사람이 신자 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구원이 사람이 하기 나름이라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구원의 방식 앞에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왜 복음이 인간의 행함을 그토록 거부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행함에도 선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한 행함과 선한 행함을 구분하여서 악한 행함은 삼가고 선한 행함을 실천하며 살면 그것이 의가 되고 그 의가 천국을 향한 길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예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추구하는 선한 행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를 생각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한 행함이 무엇이든 자신이 어떤 시련과 핍박과 고난에 처해진다고 해도 그 행함을 지키고 끝까지 실천할 수 있는가를 간과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과연 어떤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행함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인간의 행함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말씀한 것처럼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인간의 의지가 강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강할까요. 이 물음에 무슨 답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선택과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할례라고 하는 모세의 법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세의 법을 실천하는 것을 선한 의로 여기는 유대교적 전통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기에 바울과 바나바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툼과 변론이 있게 된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 몇을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 향해 가는 길에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다녀가며 이방인이 주께 돌아온 일을 전하여 그들을 기뻐하게 합니다. 베니게와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들에게 이방인이 주께 돌아오는 바울의 전도 이야기는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법을 따르는 자신들을 진실한 신앙인으로 자부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할례를 받지 않고 모세의 법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들은 구원과 상관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주께 돌아온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 구원은 모세의 법을 실천하고 할례를 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방 지역의 교회로서는 큰 기쁨이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와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해 주께 돌아오는 많은 자가 있게 된 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결국 할례와 상관이 없는 이방인이 주께 돌아오고 구원을 받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말함으로써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그 주장이야 말로 분명한 구원의 원칙을 가지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도전하는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파 중에 예수를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처럼 할례라는 모세의 법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할례라는 규례의 의미와 그 정신을 파악하기보다는 할례를 실천한 인간의 행위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의 그 의미와 정신이 인간의 심령에 살아있는 것이 진정한 할례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 할례를 실천하는 행위가 자신들을 의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렘 9:25,2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할례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고, 또한 심판을 받을 자와 받지 않을 자의 구분의 기준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은 모세의 법을 실천하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행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보여주고 알게 하기 위한 것이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고 자신의 의를 모두 버리며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알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긍휼과 자비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사랑, 긍휼과 자비는 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율법을 실천하는 자기 행위를 선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긍휼과 자비의 깊음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죄는 우리를 더욱 풍성하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인도합니다. 율법이 바로 그러한 역할과 기능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율법을 바라본다면 결코 율법을 실천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율법을 실천할 수 없고, 또한 실천을 통해 의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인간이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다만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의가 되심을 믿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행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자로 서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으면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과연 무엇을 믿음에 의한 실천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믿음의 실천의 항목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일까요? 아니면 성경 읽고 구제하는 것일까요? 그러면 밥 먹고 회사 출근하는 일상생활은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계 2:4-5절을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처음 사랑은 죄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은혜를 알게 된 그것이 처음 사랑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로 확증된 그것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처음 행위는 죄인된 나를 부르시고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신자의 참된 행위로 인정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신자에게 처음 사랑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됩니다. 죄인을 용서하신 은혜만으로 그 마음은 감사로 충만하게 됩니다. 다른 세상의 것이 더해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처음 사랑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갈수록 자신의 죄인 됨을 잊어버리고 용서의 은혜도 희미해지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자비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처음 행위도 사라져 버립니다. 남은 것은 내가 원하는 세상의 것이 주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용서가 아닌 땅의 것으로 기뻐하려고만 합니다. 이것은 천국에 합당한 심령이 아닙니다. 이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처음 사랑의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우리의 죄를 보게 하고 죄인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깨달아 주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자가 따로 실천해야 할 율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감사하는 처음 행위가 여러분의 신자 됨을 증거하는 증거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