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2강 2009.8.16. 설교)

암 4:1-5  믿음과 잘못된 열심


교회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어떤 설교를 해도 아마 그 결론은 ‘열심을 냅시다’라는 말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입니다. 그처럼 목사가 교인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열심입니다.



교인의 열심은 곧 교회의 부흥과 연결되기 때문에 교회 부흥에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목사라면 자연히 열심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한 사람의 열심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분위기도 뭔가 활기차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교회’로 보이기 때문에 열심을 믿음의 증거로 말하면서 열심을 낼 것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열심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요? 물론 성경을 보면 열심을 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령 롬 12:11절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하고, 계 3:19절에서도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분명히 신자가 내어야 할 열심은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열심을 내게 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의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열심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를 향한 열심을 말하지만, 성경은 교회를 향한 열심이 아니라 주를 향한 열심을 말합니다.



열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열심을 인간의 행함과 연결하여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교회생활이 곧 열심으로 등장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기도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십일조도 철저히 하면서 봉사와 헌신도 많이 할 때 누가 봐도 그런 사람은 믿음의 열심이 있고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생각하는 열심을 갖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4,5절에서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아침마다 제사를 드렸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열심히 있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을 합니다.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벧엘은 야곱에 에서를 피해서 도망을 칠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하늘로 연결된 사닥다리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보여준 곳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자신이 베고 잠들었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곧 이름을 벧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곱은 위대한 조상입니다. 그런 위대한 조상이 하나님을 만나고 기름을 붓고 친히 벧엘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의 성지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또한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 밟은 땅입니다. 그리고 사무엘도 이 길갈에서 제단을 쌓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벧엘이나 길갈은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땅이었고, 그래서 이곳에서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다른 온갖 제사도 부지런히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들의 종교 열심을 책망합니다. 왜 그들이 책망을 받아야 할까요?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요? 분명히 열심이 있었던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는다면 오늘 우리도 동일한 책망을 받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과 동일한 수준의 열심이라면 우리 역시도 선지자의 책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고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기쁨을 위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열심을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선민이고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즉 열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강조하는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대로 복을 염두에 두고 십일조에 열심을 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을 위한 열심입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면 벌 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한 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면 그 또한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의 중심에 자신이 살아있을 때 성경은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말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신자에게 무조건 열심을 강조하고 열심을 신앙으로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를 교회 부흥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여기고 그 신앙을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하는 거짓선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열심이 없는 게으름으로 인해서 예수님께 책망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다수이지만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행함이 없다는 것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행함을 두고 책망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열심히 기도하고 주일 잘 지키고 십일조도 잘하고 있는 신자를 책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열심 때문에 복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인데 성경은 오히려 책망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과 지식이 무너져야 함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세워두고 있는 신앙의 기준이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기준은 율법 준수였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서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도 신앙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씀을 준수하는 것, 즉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신앙의 행위로 여깁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가 생각하는 말씀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현대 교회가 생각하는 신앙의 기준에서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다지 잘못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여기는 주일성수와 십일조, 그리고 적당한 봉사와 남에게 나쁜 짓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범적인 생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신앙의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불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 성수와 십일조, 또한 다른 행함들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제사와 십일조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율법을 주시고 명령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를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신들이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실천하는 자신에게 시선을 두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서 인간에게서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의를 봤던 것입니다. 이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바산의 암소라는 것은 사마리아의 귀부인들을 바산의 좋은 풀을 실컷 먹어서 살이 찐 암소에 비유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전혀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의 본질은 항상 애굽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애굽의 종으로 있으면서 학대받고 압제 받으며 고통을 당하던 이스라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그들의 힘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은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은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로 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면서 그러한 사실을 항상 생각하고 거룩한 피에 감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산의 암소로 지칭되는 여인들이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약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드리는 모든 제사나 십일조는 이미 생명과 상관이 없는 인간의 종교 행위로 전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옷을 걸치고 행해지는 인간의 종교 행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책망을 피할 수 없는 잘못된 열심입니다.



1절 하반절을 보면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는 말을 합니다. 바산의 여인들이 남편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술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것은 크게 흠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여자가 감히 남자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여자는 남자의 다스림 아래 있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질서인데, 오히려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는 관심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다스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실상은 보지 않고 열심 있는 행함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나의 행함을 보지 않고 다만 죄인 됨을 보면서 긍휼을 구하는 자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를 종교적인 열심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합니다. 나를 보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에 온 마음을 빼앗긴 자가 되어서 다만 그 크신 용서를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하기위해 우리를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열심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열심 뒤에 자신을 감추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나를 가리는 열심을 끌어 내리고 대신 죄로 가득한 나를 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