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36강 2009.11.22 설교)

엡 5:8-9  믿음과 삶


신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누구에게나 그럴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책임져야 할 삶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구원 받은 신자의 삶이라면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의 삶과는 다르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구원 받은 신자의 삶은 윤리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윤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얼마든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신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윤리적인 삶을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윤리적인 삶은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에서 기독교인의 사랑을 보고 싶어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본받아서 이웃을 사랑해야지’라고 말하면서 이웃의 자리에 자신을 둡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사랑하면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는 신자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살피는 것은 ‘이 교회가 나를 사랑하는가?’입니다. 나를 사랑해주면 사랑 받는 그 재미로 교회를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해 주지 않으면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라고 욕하면서 등을 돌리는 것이 사람들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은 신앙의 이론에 설복되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함과 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클레이의 이같은 말은 교회의 현실을 정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에 사람을 붙들어 놓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랑이고 친절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교회에 붙들어 놓는 기술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에 대한 사랑, 친절 등을 믿음의 모습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주변의 사람에게 친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믿음의 모습으로 연결하여 생각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8,9절)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자는 어둠에 있다가 주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빛의 자녀처럼 행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신자가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신자의 빛된 삶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까? 조건은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라도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아이를 데리고 배를 탔는데 배가 침몰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구명조끼는 하나밖에 없고 또 다른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럴 때 신자가  하나 밖에 없는 조끼를 먼저 집어 들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착함을 실천하는 신자다운 것이겠습니까? ‘내 아이 말고 당신의 아이에게 이 조끼를 입히세요’라고 하는 것이 착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런 착함이 가능할까요?



의로움이나 진실함도 다르지 않습니다. 의와 진실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때 사람들은 의와 진실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라는 것은 빛에 의해서 발생한 새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양심과 윤리를 실천하여 빛이 된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서 빛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 실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빛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빛의 자녀는 착하고 윤리적인 행동과는 상관없이 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어둠이 아니고 빛으로 구분이 된 것입니다. 믿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신자 됨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신자라면 신자 아닌 사람보다 더 나은 윤리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신자 아닌 사람과 윤리적인 삶을 내세우며 경쟁하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착하게 살면 내세의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착함과 윤리적인 삶을 보시고 신자로 택하셨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택하심의 기준이라면 가장 억울하고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착함과 윤리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의 부르심은 무조건 적입니다. 부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불러내신 것뿐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학에 입학 원서를 내거나 회사에 입사 원서를 낼 때 요구되는 자격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에 미달되면 원서도 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하나님이 택한 자를 예수님이 불러내신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해서 빛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빛이 되었으니까 빛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칭찬하는 윤리적인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빛의 자녀인 신자는 빛 안에 거한다는 그것으로 이미 빛입니다. 그런데도 빛이니까 빛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들이 신자로 하여금 강박관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걸인을 볼 때 동전이라도 하나 주지 않으면 빛의 자녀답지 않은 것 같은 생각에 붙들리고 결국 동전 하나라도 줘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그런 것이 강박관념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분명히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 행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가 말한 행함은 신자가 주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심이나 윤리에 의한 행함이 아니라 주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빛의 자녀는 세상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즉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세계에서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성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았고, 그분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온 인생 된 것이 성공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의 신자는 세상에서의 실패가 낙심할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압니다. 세상에서의 실패로 낙심하고 자녀의 문제로 염려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헛됨을 보게 하시고, 주 안에서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키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을 통해서 죄를 보게 하시고 깊은 죄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실패를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날마다 예수님에게 붙들어 놓고 있음을 실감하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그것이야 말로 빛의 자녀의 특성이고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사라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주 안에서의 나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내가 잘되고 성공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내 자녀가 잘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상실되게 됩니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세계가 나를 덮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착하고 의롭게 진실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삶은 빛이라는 것은 잊어버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멍에를 같이 메고 살아가려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존재의 근본 토대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들 속에서 희미해져가는 예수님의 은혜를 다시 확보하면서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의 세계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신자는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