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3강 2009.3.29설교)

출 14:26-31 믿음의 주는 것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구원이라는 답이 쉽게 떠오를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구원을 단지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믿음은 결국 내가 구원받기 위한 용도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나를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 전부라면 ‘구원 받은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믿음을 잃어버리면 구원이 취소되기 때문에 완전한 구원을 얻을 때까지 믿음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분명 성경은 믿음을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내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밧줄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풍성하고 놀라운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엡 1:5-6절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되어진 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을 삶의 방향으로 삼아 나아가도록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미 천국에 앉은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홍해사건입니다. 홍해 사건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참으로 엄청난 기적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전혀 체험하지 못한 엄청난 기적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그 증거고 이스라엘을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위기에서 구출해준 홍해 사건만 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셨고 그들을 인도하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현장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저절로 일어날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반면에 우리는 다릅니다. 비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을 하고 또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내 주변의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있어서 아무리 기도해도 어려움은 계속되고, 병에 걸려 죽기도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커녕 접시물도 갈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에 비해서 우리는 불공평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 달에 백만 원 벌다가 하나님이 천만 원 벌게 해주시면 날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단 사원이었던 내가 하루아침에 과장이 되고 그 다음날 부장 되고 다음날 이사가 되었다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나를 도우신 결과라고 믿으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인간이 그런 수준의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것처럼 우리 앞에 계속 기적을 펼치면 되기 때문입니다.



출 1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자신들은 살고 애굽 군대는 모두 수장되는 엄청난 기적을 목격을 했는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며칠 뒤에는 물이 써서 물을 마시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모세를 원망하는 일이 나옵니다. 이것이 인간의 수준입니다.



백만 원 벌던 사람이 천만 원을 벌게 되었다면 당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자기보다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보이게 되고 결국 그들보다 더 많이 벌지 못하는 것으로 불만이 있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무엇을 체험하고 무엇을 보게 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평생을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놀라운 체험을 하던 하지 않던 인간은 동일한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놀라운 체험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이 고침 받고 기도가 응답되는 등의 체험에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고 또 그러한 믿음의 능력을 원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놀라운 체험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간다면 믿음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믿음으로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심기우는 능력을 보여줬다고 해도 그 능력이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알게 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로 만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능력을 체험했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참된 기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나의 죄에서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의지하는 자가 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어떤 기적을 베풀어도 인간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홍해사건은 이스라엘의 구원보다는 그들의 악함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해에서 건짐 받은,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엄청난 기적의 사건을 체험하고 또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까지 했으면서도 물을 마실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들을 인도하는 모세를 원망한 것은 이스라엘의 철저한 실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실패는 홍해에서의 구원을 배경으로 더 크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애굽을 홍해에 집어넣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만 나오게 하시고 애굽은 모두 몰살하신 것은 생명과 죽음을 분리하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홍해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다음부터는 자신들의 놀라운 체험을 바탕으로 평생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스라엘은 역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도 며칠 후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애굽과 다를 바 없이 죽음에 처해지는 것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생명을 얻게 된 것은 그들은 이미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죽음에서 건짐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그들을 멸망에서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된 하늘의 지혜이며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지혜가 있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는 우리의 악함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악함을 덮으시고 씻어주신 어린양의 피의 은혜의 분량이 더욱 더 크고 넓게 다가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30,31절을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의 증거는 애굽 사람의 시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는 어린양의 피의 은혜에 속하지 않은 세계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그 심판에서 건짐 받은 은혜로 인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출 1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치시는 장면은 아주 상세하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 것은 간단하게 29절 한구절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배경으로 했을 때 선명하게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천국만을 바라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의 심판을 배경으로 하여 바라보지 않으면 예수 믿은 나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군대가 없는 홍해를 건넌 것이라면 홍해 사건은 단지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기 위한 장애물 제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애굽 군대가 함께 했고, 그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사건이 있기에 죽음에서 건짐 받은 생명의 사건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단지 막연히 천국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사건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그 심판에서 나를 건지신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어린양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