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7강 7월 5일 설교)

갈 2:20  믿음 안에서


신자에게 예수 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됨을 뜻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죽음 없는 부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얘기하면 대개는 육신의 죽음을 생각하겠지만, 육신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죽음입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오직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죽음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힘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 죽음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죽음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와 함께 죽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을 실감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곧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이 죽었다라고 하면 예전의 성품과 행실, 이러한 것들이 죽고 새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울도 우리와 동일하게 욕심이 있고 자존심이 있고 정욕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을 죽이고 ‘십자가에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옛사람이라는 것이 욕심이나 정욕, 시기, 미움 이런 것이라면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은 신자에게서는 그런 것이 사라지고 없어야 합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미움 시기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진심으로 옛사람이 죽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 있던 욕심과 시기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신이 쌓은 의로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입니다. 즉 옛사람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행실이나 도덕의 기준에 악으로 규정되는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선행으로 의로운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구원의 방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자신들의 선행과 의를 보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에 있어서는 항상 자신만만했습니다.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그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입니다.



따라서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옛사람의 죽음의 증거는 인간은 어떤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의를 생산할 수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의 의가 아닌 다른 의가 아니면 구원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믿고 의지하며 예수님만 자랑하는 자로 살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십자가에 주와 함께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행하는 어떤 선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선언하는 증거물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선이 의가 될 수 있다면 십자가는 세상에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비록 평생 교회를 다니고 또한 목사 장로라고 해도 인간이 행하는 선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또한 신자라는 증거물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복음을 증거하면서 많이 하는 말이 ‘예수 안에서’입니다. 본문에도 ‘믿음 안에서’라는 말이 있는데 ‘안에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예수 안에서, 믿음 안에서라는 말을 선행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즉 신자가 예수 안에서 살고,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선행을 하고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선행을 실천함으로 믿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다시 옛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라는 것은 인간의 의를 근거로 하는 삶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근거로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안은 곧 예수님의 의가 우리의 모든 악을 용서하는 은혜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의의 은혜가 근거가 되는 삶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은혜가 아니면 사망에서 건짐 받을 수 없는 자기 실상을 바라보면서 이웃을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서 용서가 나오고 참된 구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항상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 가운데 거하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선행을 힘쓰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안에서 용서의 은총을 누리는 신자에게 또 달리 하나님의 합격점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실력으로는 하나님의 합격점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합격점에 도달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완벽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한 합격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것에 대한 결과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의 신자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의 이루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악한 자일뿐이지만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속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예수안의 신자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는 우리들에게 이같은 소식은 진심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칭송받는 재미로 살려고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의는, 세상에서 내가 칭송받고 높임 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재미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높임 받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의 의보다, 자신의 의를 앞세우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빙자해서 자신의 선행을 돋보이게 하고 싶고,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고 싶어 하는 것이야 말로 옛사람이 살아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이 아니라 예수 밖에서 사는 것이고, 자연히 예수님의 의와도 상관이 없는 세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거의 동일한데 구원받은 후를 말하면서 옛사람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버립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고, 예수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었으니까 마땅히 선행으로 믿음을 보여야 하고 예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의를 믿는 옛사람의 방식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의로 구원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예수님의 의와 구원을 얘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안이라고 해서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증거라고 여기기 때문에 선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에게 믿음의 증거를 심어 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행함을 구원 확신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로 바뀐 것이라면 분명한 것은 탐욕도, 정역도, 시기나 경쟁심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한 인간의 악함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한 선이 나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 있는 신자는 끝까지 예수님의 의로우심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내 안에 주가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즉 내 안에 주가 살아계신 증거는 인간의 선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 의는 의로 여기지도 않고 다만 주님의 의만 의로 여기며 의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자랑하며 감사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죽이라는 말도 많이 들을 수가 있는데, 이는 옛사람을 단지 교회가 생각하는 믿음의 기준에 미달하는 삶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옛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되어집니다.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함으로써 그 십자가 아래서 자신의 악함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님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되면서 그동안 구축되어 있던 자기 의가 모두 무너지고 자기 전부가 해체됨을 경험하면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오직 주님의 의의 은혜만 덩그러니 남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그동안 자랑거리로 여겼던 자기 의와 선행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신자가 다시금 자기 선행을 동원하며 믿음을 증거하고, 예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는 옛사람이 죽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된 사람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창조된 신자는 더 이상 자신을 증거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삽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믿음 안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