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4강 2009.8.30. 설교)

갈 3:13-14  믿음과 복


인간에게는 가인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 속성은 항상 자신의 것과 타인의 것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원망을 하도록 합니다. ‘타인에 비해 내가 부족한 것이 없는데 왜 자신이 더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이 불평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습니다. 다만 이 분노를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분노할 존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과 안식을 훼손한 진노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정원에 뛰어 들어가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넘치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타인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에게 넘치는 은혜는 상실되고 대신 자신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자신이 받은 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복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지금의 교회에서 진리처럼 통용되면서 복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가짜 신자로 가득한 것이 현실입니다. 복이라고 하면 누구나 물질의 복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물질이 없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물질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양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타인의 것에 비해서 너무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타인과 비교하면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보다 적게 받은 타인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내 것이 많다는 심리적 풍요를 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타인의 것과 내 것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교는 항상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내 것이 많다 적다라는 평가를 할 수 있는 기준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의 복이라는 말이 나오면 자신과 상관이 없는 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받은 것이 없이 어떻게 먹고 살아갑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삽니다. 다만 말한 대로 하나님이 타인에게 주신 것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여기는 가인의 속성이 문제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가인의 속성을 우리가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을 아무리 많이 받았다고 해도 이 속성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물질이 많다 적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고 남보다 많다고 해서 복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복으로 말할까요? 14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는데 그로 인해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미친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일까요?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복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풍부한 물질의 복을 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를 풍부라고 할 수 있느냐?’는 애매함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불편이 없고 넉넉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창 15:5,6절을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운 자로 여기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믿는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즉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의가 되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로 여김 받게 되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복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면 그 믿음은 아브라함의 공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아브라함의 복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면 다릅니다. 은혜로 주어진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의로운 것이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 받았다면 분명 아브라함에게 복은 믿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김 받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미친 것입니다.



복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은 단지 복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 뿐입니다. 이들은 소위 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흉내 내기까지 하면서 복에 집착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주에 갇힌 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인간의 복에 갇혀서 풍요로운 은혜 안에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항상 현재에 대해 불평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저주에 갇힌 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것이 곧 지옥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율법의 저주에 붙들린 우리를 저주로부터 속량하기 위해 스스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 일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신자를 물질이 넘치는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신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이 넘치는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안식이 있고, 풍요가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의가 있습니다. 이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신자에게 믿음은 참으로 존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넘치는 복을 누리는 복의 상태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 즉 말씀을 믿게 했다면, 오늘 우리에게 믿음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오늘 우리의 믿음이 다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었다는 것은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의 성취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친히 저주를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본질이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는 인간이 자기 실천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의 오해는 자기의 실천과 행함이 없으면 부족한 믿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 자체로 이미 완벽합니다. 그런데 내가 실천을 하지 않고 행함이 없으면 부족한 믿음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처럼 여기는 것은 믿음 안에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은 행함에서 우리를 구출하셨음을 뜻합니다. 자기 행함에 갇혀서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보려는 것은 여전히 율법의 저주에 갇힌 자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량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행하심 안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 당연합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된 세계에 속하게 되었고 따라서 별도로 나의 행함이 요구되지 않는 의의 세계의 백성이 된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는 믿음은 참으로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이미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실천과 행함으로 이끌어 내어서 자기 믿음을 부족함이 없는 믿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됩니다. 비행기 안에서는 하늘을 날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행기 안에 있으면서 ‘하늘을 날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궁리를 한다면 그것은 하늘을 나는 기쁨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자일뿐입니다.



신자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예수 안이라는 복된 세계를 마음껏 누리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지 복을 얻기 위해 뭔가 실천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은 가짜입니다.



믿음의 복을 누리는 사람은 행함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 하던 모든 것들이, 예수 안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기도하던 사람이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더욱 풍성히 알게 되고 예수님이 나의 전부임을 잊지 않기 위해 더욱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염려처럼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옛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에서 하는 새 사람의 마음으로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는 했다 안했다라는 말이 통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고 믿는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하든 행하지 않든 예수님의 행하심이 나를 저주에서 속량하셨는데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14절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게 하셔서 이제는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내 뜻이 포기되고 대신 주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길에 있게 된 것을 복으로 믿는다면 그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복이 있는 것이 신자임을 믿으신다면 더 이상 세상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예수님으로 기뻐하며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