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8강 2009.5.3 설교)

갈 3:23-25  믿음이 오긴 전과 후


사람이 믿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어떻게 하나로 꼬집어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한국교회가 한가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행함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행함을 강조하지 않는 교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서 행함은 신앙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의 믿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행함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행함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성경도 그렇게 말하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23절)는 말을 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이란 믿음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은 믿음이 없을 때는 율법에 매이고 율법에 갇혔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결국 인간의 행함과 연결된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사도의 말과는 다른 말이 됩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하려고 하고,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나는 행함에 매이지도 갇히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행함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행함을 기준으로 믿음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고, 행함이 없을 때는 자기 믿음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들이 바울이 말한 믿음이 없을 때 율법에 매인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바울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고 말합니다. 몽학선생이란 율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다른 말로 하면 행함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율법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표현을 할까요? 그것은 율법의 기능 때문입니다.



몽학선생은 어린아이를 돌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는 어린아이의 가정교사로 초등학문을 가르치며 의복, 식사, 행동을 돌봐주고 학교에도 데리고 다니는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스승이며 후견자의 역할을 했고 아이는 비록 노예라고는 하지만 몽학선생, 즉 스승에게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인이 되면 몽학선생은 아이에 대해 더 이상 스승이나 후견자로서의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하고 아이는 몽학선생에게 순종해야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로마사회의 몽학선생의 관습을 이용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이러한 몽학선생으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한 대로 몽학선생은 어른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오기 전의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등장시켰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의 어리석은 사람은 이제 갓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초신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으로 믿음이 증거되고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선행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믿음이 오기 전의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몽학선생의 역할로 주어진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긴 하지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몽학선생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신자가 의롭다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몽학선생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다만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죄 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신자가 실천하고 행해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몽학선생으로서 인간의 무지와 쓸모없음과 의롭지 못함과 구원받지 못함을 지적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죄에 갇힌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복음의 내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의롭게 하셨다는 복음의 내용이야 말로 죄에 갇힌 우리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선행이나 율법 준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신자가 의롭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로우신 예수님을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에 매이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의의 행하심을 믿는 자로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믿음이 온 후의 신자는 인간의 행함에서 벗어나서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을 바라보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실천을 해야 믿음이 있다는 증거다’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실천을 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칭찬하는 선을 행했다고 해도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자가 어떤 실천이 있든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고, 죄인된 자리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신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에 매이지 않는 신자입니다. 즉 행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행함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실천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행하심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행함도 선하지만 예수님의 행하심에 비해서 질이 좀 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하심 앞에 우리의 행함은 행함이라고 할 수 없고, 따라서 의라고도 말할 수 없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선한 행함 뒤에 감추어져 있는 악함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죄인 됨을 확고히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는 절대로 의에 해당될 수 없음을 아는 이것이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고 믿음이 온 후에 신자 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말을 생각해 보면, 현대 교회가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을 말을 근거로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의 행함은 결코 믿음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함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기준으로 내세워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율법에 매인 자고 믿음이 오기 전의 믿음이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뭔가 인정은 되면서도 한가지 허전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한가지 허전함이란 믿음이 온 후의 삶이 얘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함도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함도 아니고 다만 믿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나야 할 삶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능력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믿음으로 인해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삶에 나타나는 것이 없다면 그 믿음은 야고보서의 말대로 죽은 믿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삶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생각하는 믿음의 삶은 윤리적 의미에서의 선행이며 또는 종교적 활동으로도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야 할 삶이라면, 성경은 사도들의 사역에서 그러한 삶을 소개했어야 마땅합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의 길을 가도록 했고, 오늘날 신자는 사도가 간 그 길에 동일하게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 선행이라면 사도들에게서도 선행은 있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그러한 선행을 소개하면서 신자도 그러한 삶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사도들을 예수님에게 미쳐서 복음만 전했던 사람으로 얘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선행처럼 눈에 드러나는 특별한 실천이 믿음으로 나타나야 하는 삶이라면 여러분은 날마다 선행을 하기 위해 힘을 써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야 하고, 고아원이나 복지관을 찾아가서 봉사해야 합니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믿음의 삶’을 말한다는 것은 너무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가정주부의 일상생활은 특별하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집안일 하고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하루가 지납니다. 그러면 그러한 가정주부에게는 믿음의 삶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믿음의 삶을 어떤 특별한 선행으로 생각한다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정주부에게는 믿음의 삶이 없습니다. 이것이 타당한 말이라고 생각됩니까?



믿음의 삶은 그냥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 바울처럼 영원히 저주에 갇혀야 할 자신이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 받게 된 것만으로도 자신은 넉넉한 자임을 깨닫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주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은 세상의 어떤 일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항상 그 마음이 주를 향하게 됩니다. 다만 주의 은혜가 감사할 따름이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 온 후에 나타나는 신자의 변화이며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