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6강 2009.9.13 설교)

히 6:9-10  믿음과 확신


믿음과 구원, 기도 응답에 확신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고, 또 사람들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의 믿음은 결국 의심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믿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면 확신이 생길까요? 하지만 그런 것은 자기 세뇌일 뿐입니다. ‘믿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외치게 되면 그 말이 자기에게 새겨지게 되고 스스로 자신을 믿는 자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반복으로 인한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학과 연관된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확신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확신이 있다면 어떤 일이 주어진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날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받아들이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고백할 때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긴가민가 하는 마음으로 고백을 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베드로가 과연 믿음에 성공합니까?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고 장담을 합니다. 이 말 역시 당시 베드로는 분명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계획을 갖고 있으면서 거짓으로 버리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도 역시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상기시켰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며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고 장담을 합니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그때의 베드로의 마음이었고 자신감이었고 확신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으면 거짓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주와 함께 죽는다고 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것이 베드로의 확신이고 굳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가 베드로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도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도망을 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베드로는 그랬지만 나는 안 그럴 자신이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마음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실패와 무너짐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연약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인간에게 있는 두려움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존문제에서는 한없이 연약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임을 보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인간의 자기 확신이 믿음을 지탱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 확신을 하고 또 확신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육체에 위협이 오게 되면 속에 감춰져 있던 두려움이 여지없이 고개를 들면서 내가 사는 방향으로 가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기자가 서신을 쓰고 있는 대상들이 구원에 가깝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구원 문제에 대해 확신한다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를 확신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말 대로 하면 제가 여러분을 향해서 ‘여러분이 구원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라는 말도 가능하다는 뜻인데, 과연 그런 확신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제가 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속이 아니라 겉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 또한 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제가 안다고 해봐야 그 역시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짐작하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판단치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즉 외적인 것이 믿음이나 구원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속을 볼 수 없는 저는 믿음이나 구원의 문제에 아무런 판단도 확신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예수님께 맡길 뿐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의 속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확신을 하는 것입니까? 10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는 이 말씀이 확신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확신은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것으로 인한 것입니다. 사랑으로 성도를 섬겼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아무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를 사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졌고, 그로 인해서 그가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를 사랑하는 것은 주 앞에서 자신이 죽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인되고, 자기의 힘을 근거로 삼았던 삶이 모두 무너짐으로써 가능한 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이 무너지고 자신이 죽은 자가 되는 것이 자기의 생각과 마음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자신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욕망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본능, 욕망을 자기 생각과 마음으로 통제하면서 자기가 부인되는 길로 가는 것은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강력한 능력이 뭔가 하면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를 주께로 밀어 붙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나를 살리신 주님이 살게 하시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확신, 자기 믿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구원의 근거가 되고 힘이 되고 확신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지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가 믿는다’라든가 ‘나는 구원받는다’는 자기 생각, 자기 확신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백성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확신을 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내 확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확신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도 변할 수 없고 달라질 수 없는 굳건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원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었을 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해 감사함이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내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주를 사랑하고 형제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신자의 섬김은 형제 앞에 낮아지는 것이고, 형제 앞에서 낮아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 때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의 악함을 생각하며 주를 바라보게 되고, 형제를 대할 때 세상의 것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구원될 수 없는 죄인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구원에 가깝다는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멸망의 세상에서 오직 나밖에 모르는 자로 살아가던 우리를 택하사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사하면 될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확신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