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4강 2009.4.5설교)

히 11:1-2  믿음이 증거하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생각과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엡 2:8절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사고와 이해와 상식에서 벗어나 계신 분임을 뜻합니다. 만약 우리의 사고와 이해로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예수님이라면 굳이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신의 이해와 사고로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바로 그러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인간의 이해와 사고에 부합된 것이고, 인간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믿음을 말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참된 믿음이 증거됨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참된 믿음을 본문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2절)고 말합니다. 그러면 먼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바라는 것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세상을 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을 향한 것입니다. 세상과 하늘을 동시에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쪽을 바란다면 다른 쪽을 향한 관심은 자연히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면, 그 바라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의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바라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것은 이미 실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없어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세상의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부자 되는 것이라면, 부자라는 그 실상은 세상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라는 실상이 존재하고 내 눈에 확실하게 보임으로 말미암아 부자라는 것에 마음이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 바라는 것의 실상 역시 세상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공한 자식을 둔 부모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그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가지고 내 자식도 잘됐으면 하는 욕망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바라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면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는 것이 하늘에 속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것은 실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과연 하늘의 것의 실상이 존재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호화아파트는 실상으로 존재하지만 천국은 실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 확인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좋은 나라일 것이다’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할 뿐 실상을 알 수 없으니 천국에 대한 부러움이 세상의 것보다 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하늘의 것의 실상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볼 수 없지만 신자가 바라는 하늘의 것의 실상을 가졌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실상을 가졌기에 하늘의 것을 알 수 있는 보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 하늘나라에 거하게 되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고전 13:12절의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말씀처럼 희미하게 보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은 세상의 것으로 얼마든지 증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속한 것이라면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증거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증거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늘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있다면 이미 증거를 가졌고 또한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음을 뜻하기 때문에 달리 육신의 눈에 확인되는 증거가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확신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도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될 수 없고, 병 고침도 증거가 될 수 없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것들도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증거로 삼아 보지 못하는 것들을 자기 것으로 확보하고자 한다면 그 역시 믿음이 없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면, 믿음이 있는 신자는 세상의 것을 증거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실상과 증거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분명 가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자 되는 것이 복 받은 것이고 믿음이 좋은 증거라고 한다면 그것이 가짜인 것이고, 자식이 잘되고 성공한 것이 또한 복이고 믿음이 좋은 증거라고 하는 것도 가짜인 것이고, 안수 받고 기도해서 병이 낫고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이 역사하는 증거라고 하는 것도 가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증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믿음이라면, 믿음이 있는 신자는 눈에 보이는 증거물들이 전혀 없다고 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믿게 됩니다. 현재의 삶이 어떤 형편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그 형편에 흔들리지 않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자신의 전부로 바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등장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을 증거물로 내세우는 모든 것이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고 증거물로 삼고자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병이 낫고 방언을 하는 그러한 것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물로 삼고자 하는 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 병이 낫고 방언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병 나음이 그대로 반복되어야 당연합니다. 즉 여기저기서 소경이 눈을 뜨고, 문둥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고, 독을 마셔도 멀쩡한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그러한 것이 없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 역시도 믿음입니다. 즉 믿음이 주어짐으로써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모두가 세상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신자가 바라며 살아가는 하늘의 것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들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세상에서 겪는 일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령 길을 가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전부라면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쳤다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자동차 사고로 크게 다치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온 것이 내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배후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맡기는 겸손으로 나오게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얹어 놓기 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사고로 크게 다친 상황에서 빨리 낫게 해 달라’는 애원만 있을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믿음의 증거로 말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눈에 보이는 행함을 믿음의 증거로 내세워서 자기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 역시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증거는 믿음과 상관없이 세상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 5:20절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잊고 있는 듯합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와 도덕으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윤리와 도덕도 천국 앞에서는 쓸모없는 것이고, 믿음과 상관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악함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의의 자리입니다. 나의 행함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생명임을 알게 되는 이것이야 말로 믿음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가 있는 자가 하늘의 것을 바라게 되는 것이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도 증거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실상과 증거인 믿음이 그의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