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6강 6월 28일 설교)

히 11:5-6  믿음과 상


현대 교회가 믿음을 말할 때 빼 놓지 않고 강조하는 것은 ‘상’입니다. 이는 믿음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 인한 것인데, 믿음을 인간의 열심과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상에 대한 말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개 보면 믿음이 믿음답게 증거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열심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교회들마다 ‘열심을 내라’며 교인들을 다그치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열심을 내라며 다그치는 것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목사들이 잘 압니다. 때문에 성경구절을 몇 가지 근거로 제시하면서 하나님은 열심히 행한 자에게 상주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천국에 가서 상 받기 위해 열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오직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을 강조하는 것은 관심을 신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꾼으로써 교회에 도움이 되는 것에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교인들을 이용하기 위해 성경구절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상의 문제입니다.



물론 신자가 받는 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은 모든 신자에게 동일합니다. 세상에서 한 일에 따라 차등으로 주어지는 상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에서 받는 상에 차등이 있다면 결국 상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도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뜻인데 그것은 천국의 속성에 맞지 않음을 잘 알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사고방식에서는 상에 차등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모두 동일하지 않는데, 수고와 봉사에 따른 상에 차등이 없다면 분명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상에 차등이 없다면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수고하려고 하겠습니까? 많이 일한 사람이 더 크고 좋은 상을 받아야 더욱 힘을 내서 봉사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은 사단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상이 주어진다고 해도 천국의 사람들은 전혀 불만을 가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고,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곧 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봉사하면서, 주님으로 인해 고난을 받으면서 주안에서의 기쁨을 누립니다. 때문에 천국에서의 더 많은 상은 아예 생각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께 속한 사람 되었다는 것이 큰 영광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오직 무익한 종일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자랑할 만한 자기 일도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일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상의 차등을 말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수고롭게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이고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계산된 것일 뿐이며, 신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천국에는 상이 있습니다. 6절에서도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상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상에 차등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또한 자기의 공로로 받는 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간 사람입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하늘로 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5절 하).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듣기가 힘듭니다.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해서 그를 기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손님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손님의 식성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만 잔뜩 장만해 놓고 손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물어야 합니다. 목사가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잔뜩 나열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목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과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무엇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의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예배당을 크게 건축하는 것,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 선한 일을 하는 것,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한 일들로 생각이 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상식과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답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답은 항상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본문에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는 말씀이 그 답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에녹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었고, 그 증거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간 것입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갔다는 이 사실을 믿는다면 그것은 죽음과 상관없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죽음에 갇혀 살아가는 무덤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뭘 해도 죽음에 갇혔다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온갖 영광과 명예를 누리며 살았다고 해도 그 본질은 죽음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육신이 세상을 벗어나면서 영원한 고통이 있는 멸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죽음의 도시로 바라보는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힘으로 삼지 않음을 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힘이 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보지 않고도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신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가서 받는 상이 따로 있을까요? 에녹에게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갔다는 것이 이미 상입니다. 그러면 4절에 등장하는 아벨은 그가 비록 천국에 갔다고 해도 에녹과는 달리 죽음을 맛보았으니만큼 에녹보다는 못하다고 해야 합니까?



에녹은 죽지 않고 아벨은 죽었다는 것은 다만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의 차이일 뿐입니다. 아벨은 죽음을 통해서 믿음을 보여주는 역할이고,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간 것으로 믿음을 보여주고 죽음의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증거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아벨이 죽은 것도,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것도 누가 누구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그들을 그러한 길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누가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기쁨을 위해 살아갈 자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믿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부르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자신의 기쁨을 위한 상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믿음이 자신을 이끌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믿음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도, 상을 받을만한 공로도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지만 ‘상급차등론’은 ‘내가 일했다’는 사고방식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상급차등론’은 성경이 아니라 사단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상은 잘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우리가 잘 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잘하신 것에 대한 보상인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받는 상입니다. 그러므로 상이란 오히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지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는 상을 천국에서까지 다른 사람과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과 연관시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계 22:1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일한대로’라는 말은 우리가 수고하고 봉사한 분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수고하고 봉사한 일의 분량에 따라 상을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를 해 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일은 교회에서의 수고와 봉사겠지만, 하나님께서 일로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요 6:22). 즉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악함을 알고 자신을 사망에서 건지실 예수님의 의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생명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도 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상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가 바로 하늘에 속한 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