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7강 2009.9.20 설교)

약 2:14-17  죽은 믿음


신자는 다른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세상을 소망한다는 것은 기존의 세상에 대해서는 소망을 두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믿음은 ‘나는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일 뿐이고, 내가 영원히 거할 본향은 하늘에 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을 향한 집착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은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집착을 한 채 살아갑니다. 예수의 이름을 빌어서 세상에서 힘 있는 자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욕망도 드러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세상의 비판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으로 인한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믿음의 삶에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이 포함되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윤리와 도덕이 믿음에 의한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살면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쨌든 믿음의 정신은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당한 뇌물을 받는 것도 믿음의 정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뇌물 받는 것이 믿음의 정신은 아니지만,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위를 이용해서 뇌물을 받는 것은 세상을 돈으로 사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불의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른 세상을 소망합니다. 그 세상은 돈이 힘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부터 돈으로 사는 사고방식에서는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믿음에 의해서 부당한 뇌물을 받는 불의를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수입으로 만족하며 감사하게 살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믿음의 정신에 머물러 있다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의 모습은 자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즉 윤리와 도덕을 말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행하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것을 믿음으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적인 실천을 교회는 행함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 참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는 구절을 말하지만 이 구절은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의 말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1:22절에서도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야고보는 분명 행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행함이 아닌 믿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두 성경의 서로 충돌하는 듯한 내용 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다’고 말하지만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까지 들면서 아예 행함을 거부하고 있고,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1)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행함을 말합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과 야고보가 신학적인 문제로 서로 대립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은 어떤 의미의 말일까요? 어쨌든 윤리적, 종교적 실천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도 바울의 말과는 충돌됩니다. 따라서 죽은 믿음에 대한 의미가 사도 바울의 말에 전혀 충돌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 해석이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 앞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즉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 자매에게 쓸 것을 주지 않으면서 마치 그들을 걱정하는 듯한 말만 하는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믿음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쓸 것을 주는 것입니까?



야고보는 행함에 대해 또 다른 예를 들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아들까지도 제물로 바칠 수 있어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24절에서는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도와준 라합의 예를 들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문자대로 하면 남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걸 수 있어야 참된 믿음이라는 뜻이 됩니다.



지금까지 야고보가 말한 세 가지의 행함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세 가지의 행함 중에 비교적 쉬운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해도 아들을, 그것도 독자를 제물로 바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을 돕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이에 비하면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에게 쓸 것을 주는 것은 비교적 쉬운 행함에 속합니다. 전 재산을 내어 놓아야 하는 일도 아니고 다만 헐벗은 자에게 쓸 것을 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나 라합과 같은 행함이 없어도 헐벗은 자에게 쓸 것을 주는 행함만 있으면 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야고보는 ‘세 가지의 행함이 모두 있어야 죽은 믿음이 아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비록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행함은 있었지만 라합처럼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하는 행함은 없습니다. 라합 역시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돕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처럼 자식을 바치는 행함이 없습니다. 우리 역시도 헐벗은 자를 돕는 행함은 있다고 해도 아브라함이나 라합과 같은 행함은 평생토록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야고보의 말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해서 무리하게 적용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야고보가 언급한 세 가지 행함은 각기 다른 행함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죽은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결의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장을 보시면 가난한 자와 부자를 차별하여 대하는 것에 대한 얘기로 시작하면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을 죄를 범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야고보가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후에 긍휼을 말하는 것은 사람 차별이 곧 긍휼과 연관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긍휼에 대해 말한 뒤에 앞서 말한 세 가지 행함을 얘기한 것 역시 세 가지의 행함이 긍휼과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단지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문제로 접근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전락됩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긍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외적인 조건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신자라면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맙시다’라는 캠페인 같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을 압시다’라는 선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예수님이 베푸신 용서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쉬지 말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행함은 예수님의 긍휼로 형제를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긍휼이 없는 죽은 믿음, 즉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일 뿐이라는 것이 야고보의 말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에 대해서도 인간적 동정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긍휼로 대해야 합니다. 이처럼 긍휼은 자기의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어 놓게 합니다. 그래서 헐벗은 자에게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쓸 것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정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도 아브라함의 무조건 적인 순종이라는 시각으로만 보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 인해 드러난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외였습니다.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에 수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죽어야 할 우리 대신에 제물을 준비하셨음을 보여주십니다. 그 제물이 예수님이시고,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경외하고 존귀히 여겨할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긍휼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도와준 것도 인간적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셨고 그 하나님이 여리고를 무너뜨릴 것을 믿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것은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수 2:12-13)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고보가 말한 세 가지 행함의 중심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야고보가 말한 행함은 긍휼을 의미하며, 따라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심령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면 그로부터는 긍휼의 모습이 증거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