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32강 2009.10.25 설교)

요 1:14-16  믿음과 은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은 인간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그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자기의 육신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환상일 뿐이고 헛된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라면 굳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우리의 모든 일을 처리해 주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일까요?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그 역시 육신으로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택한 자기 백성을 골라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함께 거하심으로써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을 죄와 의로 나누시고 죄에 속한 자를 심판하시고 의에 속한 자는 생명에 들이시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도 세상은 나름대로 죄와 의를 구분하고 죄는 멀리하고 의를 실천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오셔서 죄와 의를 구분하셔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이 구분하고 있던 죄와 의는 인간의 선악관에 의한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은 죄에 속한 것일 뿐이고 의는 없으며, 의는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라는 것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의에 속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죄밖에 없음을 깨닫고 의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은 악을 행해서가 아니라 도덕에 가려져 있는 자신의 악한 실체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고집하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벌어지는 은혜의 사건들은 인간의 종교체계에 가려져 있던 모든 죄가 드러나고 예수님의 의가 곧 생명임을 믿게 하는 것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의 의를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그에게 하나님이 벌이시는 은혜의 사건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또 다시 은혜를 받고 싶어서 안달하는 수준에 있습니다. 즉 믿음과 은혜를 개별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혜에 속하여 있고,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은혜가 충만한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를 믿은 적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은혜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은혜’ ‘사업이 잘되는 은혜’‘병이 낫는 은혜’ ‘기도가 응답되는 은혜’, 이러한 것을 은혜로 여기면서 그런 은혜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싶어서 기도원을 찾기도 하고 성령 집회라는 것을 쫓아다니면서 색다르고 특이한 체험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것들이 은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룻기서에 등장하는 룻은 모압여인, 즉 이방여자입니다. 그 여인이 흉년으로 인해 모압으로 피신 와서 살게 된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남편과 아들이 모두 죽어서 룻은 나오미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살게 됩니다. 하루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가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습니다. 그것을 본 보아스가 룻이 마음대로 이삭을 줍도록 해주자 룻은 이방인인 자신에게 왜 은혜를 베푸는지를 묻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이방인으로써 그러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룻에게 보아스는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즉 보아스의 말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은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룻에게 있어서 기쁨과 은혜는 체험적인 것이나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방인인과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여호와의 보호를 구하는 모든 자를 받아주시고 상주시는 분이라는 그 말이었던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된 것이 은혜고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는 사람의 자격과 자질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든 자기에게는 의가 없음을 알고 예수님의 의를 믿겠다고 나온다면 누구든 받아주시고 예수님의 의의 날개 아래 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상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하늘의 의로 오셨고, 인간에게는 의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예수님의 의를 피난처로 삼아 주께 나오는 모든 자를 받아주시고 그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는 그 말씀만으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미 성령의 충만과 은혜의 충만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상태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믿음을 자신의 선택과 자기 의지의 결과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를 믿는 믿음의 대가로 복이라는 것을 기대하기도 하고, 믿음 외에 별도로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아니라 단지 종교인의 수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든 말든 그것보다는 은혜를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다니는 보람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생각하고, 관심 두고, 기대할 것은 뻔합니다. 교회생활이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어주고, 부담이 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비현실적인 말도 삼가면서 다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강연만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가고,  그분을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 무슨 관심거리가 되겠습니까? 육신으로 오시면서 양손에 선물 보따리를 잔뜩 안고 오시고 선물을 나눠주신다면 육신으로 오신 분에게 조금 마음이 갈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결국 육신으로 오신 분을 향한 관심이 아니라 그 분의 손에 들고 있는 선물이 관심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선물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예수님께 나오는 모든 자에게 나눠주십니다. 그 선물이 바로 영생,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오다가도 선물의 내용을 듣게 되면 실망한 듯 돌아 서버립니다. ‘영생 말고 또 다른 선물이 있지 않으냐?’고 고집부리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은 달랑 하나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영생 말고 도 다른 다양한 선물을 준다는 다른 예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다만 예수님이 가져오신 영생에만 마음을 두면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의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발생한다는 것이야 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에 있는 신자는 또 다른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체험이나 세상의 일이 잘 되는 그것을 은혜로 간주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충만한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가 바로 신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세상에서는 그 육신만이 가장 거룩하고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그 어떤 육신도 거룩하다고 할 수 없고, 또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육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무너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역사로 인해서 창조되는 것이 신자인데,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벌이신 은혜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사귐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에 속하게 된 것 또한 은혜의 사건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은혜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은혜를 더 얹어서 갑절로 주는 은혜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은혜의 세계에 있다면 그에게 세상의 일은 더 이상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놀랍고 충만한 은혜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는 지금 당장은 고통이 될지 언정 그 마음은 항상 예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