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11강 5월 24일 설교)

눅 7:1-10  백부장의 믿음


본문은 병든 종을 위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종을 구원해 달라고 부탁한 백부장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는 말씀으로 그 믿음이 참됨을 증거하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처럼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믿음을 참된 믿음으로 증거하시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문둥병을 고침받은 열명의 사람 가운데 예수님에게 돌아와 사례한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참된 것으로 말씀하기도 하셨고, 귀신들린 딸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가나안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는 모진 말씀에도 ‘예 맞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시고 ‘믿음이 크다’라고 하신 일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님 뒤로 와서 겉옷을 만진 열두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하셨고,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 받았다는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은 일이 있는데, 그때도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을 하신 일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믿음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시는 내용들이 많은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거의 모두가 병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병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놀라운 인물로 여기고 병을 고침받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정성이나 열심, 또는 그런 마음을 두고 믿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일단 성경에는 이처럼 예수님을 찾아왔거나 만난 병자들의 믿음을 참된 것으로 증거하시는 말씀은 있지만 당시 신앙생활에 아주 투철했던 바리새인이나 장로,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신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가 믿음의 행함으로 강조하면서 실천을 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정작 예수님에게는 믿음으로 인정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병은 단순한 질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경에 등장하는 병자들이 단지 질병에 걸린 사람의 역할로 등장하는 것이라면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일은 예수님 스스로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증거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서의 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저주에 붙들려 있는 인간의 실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병고침은 육신의 병을 낫게 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갇힌 우리를 건지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가셔서 식사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동네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는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울며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역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여인은 병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다면 창녀일 가능성도 있고, 그렇다면 그 여인은 다른 병자들처럼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여김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참으로 존귀한 분으로 여겼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만난 적도 없는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무엇이 비싼 향유를 통째로 부을 정도로 그 여인에게는 존귀함으로 다가왔을까요?  여인을 죄인으로 강조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마 예수님을 죄에서 건져주실 분으로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참된 믿음으로 인정하신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그 증거가 예수님을 찾아온 병자들로 인해서 나타났기 때문이고, 그 증거는 바로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을 병에서 해방시켜 주실 구원자로 바라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단지 육신의 질병을 낫게 하시는 예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육신의 병만을 병으로 본다면 그는 자신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에 대해 보지 못하는 자가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저주에 갇힌 인간의 실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아닌 것이 됩니다. 자신을 저주에 갇힌 자로 볼 수 있어야 십자가의 피가 무엇 때문인가를 알 것이고, 그 피가 곧 자신을 저주에서 구출하는 능력이 됨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으로 그 믿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영혼이 병든 자로, 저주에 갇힌 자로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저주에서 건지시고 해방시켜 주실 메시아로 바라보고 그 이름을 부르는 그것이 참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으로 여김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본문의 백부장에게서도 이러한 믿음이 나타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사람을 보내서 자신의 종을 구원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 지역을 담당한 군대 장교였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큰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내 집에 와서 내 종의 병을 고쳐라’고 명령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부탁을 하기 위해 장로 몇사람을 보냅니다. 이것을 두고 흔히 백부장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믿음을 겸손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믿음은 겸손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높은 사람이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백부장의 겸손을 말하려면 백부장이 장로들을 보내지 않고 친히 예수님을 찾아갔어야 합니다. 그것이 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일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왜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7절을 보면 백부장이 집으로 찾아온 예수님께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지 않을 것은, 자신은 감히 예수님 앞에 나설 수도 없는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도덕에 의해서 표출되는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을 때만 나오는 겸손인 것입니다.



권세를 가진 백부장이 자신을,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없고 볼품없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로 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닐 수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권세도 예수님 앞에서는 내세울 가치도 없는 쓸모없는 것임을 알았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자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을 찾아오셨을 때 백부장은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는 말로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만류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존귀한 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을 모실 수도 없는 하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백부장은 예수님을 영접해서 큰 잔치를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대접을 소홀히 하는 것이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존귀한 분으로 섬기는 것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집에 들어오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으로도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말씀만 하시면 예수님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줄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백부장에게서는 정말 예상할 수도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은혜요 선물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나를 보게 하고 주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감히 주께 나올 수도 없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의 행함을 내어 놓으며 복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감히 예수님께 복을 말할 수도 없고 복을 받을 자격도 없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보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마음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백부장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을 누구신지를 알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도 감당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한 것처럼 우리도 비록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다고 해도 얼마든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여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의 고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