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2강 2009.3.22.설교)

눅 17:5-10  믿음의 능력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신자에게 믿음을 강조합니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라고 하기도 하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한 믿음이 되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이러한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마 ‘믿음은 내 하기 나름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뜨거운 믿음이 되기 위해 기도원을 찾아가고 부흥회에 참석하기도 하며, 게으르지 않는 믿음이 되기 위해 교회 일에 열심을 내려고 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 믿음을 잘 키워서 좋은 믿음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치 못한 믿음을 주셨고, 완전치 못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들 소관이라는 의미가 돼 버립니다.



위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완벽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 신자를 장악하고 다스림으로써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뜨거운 믿음을 가지라거나 믿음을 키우라는 말 등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의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믿음이 중요한 것만큼 믿음에 대한 오해 또한 큽니다. 그 중에 하나가 믿음의 능력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믿음이 능력이 있는 믿음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신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능력은 뻔합니다. 병이 낫고, 귀신들림 사람이 고침 받고 기도에 응답을 받는 그런 능력을 원하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체험했노라고 간증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증을 듣고 있으면 아무런 능력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믿음이 초라하게만 여겨집니다. 그래서 자기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믿음만 있으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만 기도하면 해결될 것이고, 병이 들었다고 해도 믿음만 있으면 고침을 받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러한 삶에 자신감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일들이 믿음만 있으면 해결되는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음을 여러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게 되고 병이 들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혹시 해결되고 나을 수도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말을 하는 제가 믿음이 없는 것일까요? 믿고 하면 되는데 믿음이 없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몰랐다면 저 역시 ‘믿음으로 합시다. 믿으면 다 됩니다’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이 여러분을 선동하는데 있어서 분명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일종의 ‘믿음만능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 하나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일이 해결 돼 버리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믿음을 거의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고 또 그런 잘못된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 나오면 ‘믿습니다’라는 말을 외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습니다’라고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 있음을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을 보여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을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내 믿음을 보시고 나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속셈입니다. 이러한 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며 또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뽕나무로 하여금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는 말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 믿음이야 말로 크고 위대한 믿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믿음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막 11:23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내가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고 해도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다 된다고 하는데 저는 믿으면 다 된다는 말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성경과 다른 말을 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는 말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이 없이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현재의 조건과 형편, 그리고 자신에게 구축된 상식과 모든 것을 동원하여 결과를 계산합니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지 땅에서 위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축된 상식이고 과학이며 또한 지금껏 보고 체험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전혀 의심이 없이 떨어지는 비를 향해 ‘위로 올라가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조금의 의심도 없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이미 있습니다. 즉 마음에 의심이 없는 믿음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믿음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뽕나무에게 바다에 심기우라고 말을 하면 뽕나무가 순종할 것이지만 과연 그런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는 말도 꺼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해봐야 미친 사람이라는 조롱만 받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우라는 말도 할 수 없는 우리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것이 제자들이었고 오늘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용서를 받고 또 다시 죄를 짓고 다시 회개하는 일이 일곱 번 반복된다고 해도 용서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곱이라는 횟수로 고정된 용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용서를 의미합니다. 즉 형제가 나에게 계속해서 죄를 범한다고 해도 신자에게서 나올 것은 용서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6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부족해서 그러한 용서를 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더해주셔서 예수님이 말씀한 용서를 실천하게 해주십시오’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의미로 6절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6절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도 믿음이 없는 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다만 그 믿음을 뜨겁게 만들고 부지런한 믿음이 되게 하면 능력이 나타날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참된 믿음에서 벗어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체를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10절)는 말씀처럼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체를 자신에게 두는 사람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행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 행함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종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명대로 할 뿐이고 따라서 주인에게 사례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자신이 행한 것을 내어 놓고 그에 대한 보상, 사례를 기대하는 것은 이미 종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장사꾼의 속셈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악한 종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에 다스림을 받는 신자는 자기 행함을 바라보며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아예 자기 행함으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복음을 증거하고 은혜를 나누고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내가 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나는 주인의 말씀에 순종되고 있을 뿐이고, 순종하게 되는 것도 믿음의 능력일 뿐이다’는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신자란 이런 사람이고, 인간을 이러한 신자로 바꾸어 놓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우게 하고,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능력을 체험했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크고 놀라운 능력과 기적은 자기만을 바라보는 완악한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 능력에 붙들려서 기적을 누리며 종으로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