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7강 4월 26일 설교)

눅 17:11-19  돌아온 자의 믿음


우리는 수많은 것을 누리며 삽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 중에는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당장 숨을 쉬게 해주는 공기가 그러하고, 물이 그러하고, 햇빛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결코 자력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숨을 쉬게 하는 공기 하나에서까지 말입니다. 나 같은 자가 숨을 쉬는 것까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이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기 때문에 은혜라는 생각이 특별히 들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해와 공기처럼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를 일반적인 은혜라고 구분하면서 그 가치를 하락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원을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햇빛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감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하는 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시 136:7-9절을 보면 “큰 빛들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처럼 신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감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나 같은 자를 숨 쉬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영원하십니다’라는 고백이 참된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은 자리에서 나오는 감사는 다만 형식적인 것일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인자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본문의 내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문둥병이 나은 한 사람의 감사가 단지 육신의 나음을 입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실 때 한 촌에 들어가셨을 때 문둥병자 열 명이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향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음을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사례하고 예수님은 그를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내용에서 먼저 의문이 드는 것은 왜 문둥병자들에게 굳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그들을 깨끗케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문둥병자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취급하고 개처럼 여기는 한 사람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씀에 곤란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갈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장에게 가라는 말씀에서 신분의 차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다른 유대인 문둥병자와 동일한 은혜를 받습니다. 즉 다른 문둥병자들은 병 나음을 당연한 은혜로 생각했을 수 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당연한 은혜가 아니라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인자하심으로 다가왔을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열 명의 문둥병자가 똑같이 나음을 받았는데 왜 유독 한 사람만 예수님에게 돌아오고, 나머지 아홉은 제 갈 길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온 것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즉 돌아오지 않은 아홉은 예수님을 병 고치는 능력이 있는 분으로만 여겼지만 돌아온 그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점을 무시해 버린 생각이고, 왜 굳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간과해 버린 생각일 수 있습니다.



병 고침 받은 능력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게 되었다면,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은 병 고침 받는 경험으로도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즉 성령과 무관하게 기적의 경험만으로도 예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님을 아는데 있어서 병 고침 받는 기적은 참으로 중요한 체험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병 고침 받는 기적이 없는 것보다는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일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말도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같은 경험을 하고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했을까요? 머리가 나빠서 일까요 아니면 성령의 도우심이 없어서 일까요? 성령의 도우심이 없어서라면 결국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병 나은 경험과는 무관하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안다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막 5:7절에 보면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에게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귀신도 분명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일컫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귀신도 갖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식이 우리를 예수님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기 보다는 ‘나 같은 자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당신의 인자와 사랑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처절한 고난으로 몰아넣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그 인자와 사랑을 사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도무지 구원받은 가치가 없고 은혜를 입을 자격도 존재도 못되는 나 같은 자에게 인자와 자비하심이 주어져서 저주에서 건짐 받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음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 인자와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의 분량은 인간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감상적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순간적인 마음의 감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 나의 존재성을 보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멋진 감동으로 마치 자신이 예수님에게 가가이 가 있는 것 같은 착각만을 갖게 할 뿐입니다. 신자는 말씀 앞에서 철저히 죽어져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라는 제목의 찬송처럼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구원해 주셨는지요? 너무나 크고 높으신 은혜에 할 말이 없습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에게 돌아간 것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봤기 때문입니다. 믿음 있음과 없음의 구별은 바로 이것으로 드러납니다. 유대인 문둥병자들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하나님의 인자를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은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돌아가서 예물을 바치면서 자기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를 보게 된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고 예수님에게 돌아가서 사례 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같은 해와 달을 보고 살아가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쉬며 살아가면서 비록 자신의 세상 일이 실패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는 차별이 없음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 만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인자하심은 외면해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감사목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처럼 자신의 병 나음만 생각할 뿐 평생 문둥병자로 살아가야 할 자신들에게 주어진 인자하심을 보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수요일설교

소경 바디매오

막 10:46-52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악한 존재일 뿐이고 무엇 하나 받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구원이라는 것이 웬 말이겠습니까? 영원한 저주가 합당한 우리들에게 생명이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감사거리를 챙기려고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를 보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를 위한 길로 가게 될 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증거된 하나님의 인자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