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12강 5월 31일 설교)

눅 18:1-8  믿음과 기도의 관계


믿음과 기도의 관계에 대한 대개의 생각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약 5:15)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놀라운 역사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는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간편하게 생각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1절의 내용만 보면 예수님은 지금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의 마지막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절 하)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대개는 이것을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들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을 믿음으로 이해를 합니다. ‘믿음이 과연 그런 것일까?’라는 생각과 고민은 전혀 하지도 않은 채 인간의 욕망과 잘 연결되는 말을 골라내서 사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성경은 말씀하신 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고 진리와도 상관없게 되고 다만 인간이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 편리한 대로 이용하고 난도질 하는 성경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끈질긴 기도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끈질긴 기도라는 말 자체가 성경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만들어 낸 단어이고, 따라서 끈질기게 기도하면 마지못해 기도를 응답한 다는 하나님도 성경과 상관없이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님 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것이 끈질긴 기도의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런 오해를 줄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끈질긴 기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본문을 본다면 본문의 의미로 인해 고민은 하겠지만 적어도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도 견디지 못해 응답하시고야 만다’는 엉터리 해석으로는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끈질긴 기도에 견디지 못하고 뜻을 꺾으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신실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고집에 끌려가는 이상한 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끈질긴 기도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가짜 기도일 뿐이지 신자의 기도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이러한 말씀을 하실까요?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있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면 본문은 마지막 때의 심판과 연결된 내용임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고 기도에 대해 말씀을 하실까요? 그것은 마지막 때의 심판이라는 형편이 신자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비유로 말씀한다는 것도, 마지막 때란 신자가 낙심하게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현실의 형편에 대한 눈이 떠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낙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은 환경적인 문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어려운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되는 요인으로 인해서 낙심이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낙심을 환경적인 문제로 생각하면, 환경에 따라서 낙심하는 사람이 있고, 낙심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모든 신자를 향한 보편적인 진리로 다가가지를 못합니다.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낙심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고,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낙심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낙심을 할 처지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결국 본문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될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재판장은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진 것이 없고 힘도 없는 과부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과부는 계속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를 하자 재판장은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24,25)는 반응을 보입니다.



재판장은 과부의 정성에 감동이 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과부가 자신을 번거롭게 하기 때문에 그 원한을 풀어 준다고 할 뿐입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하나님을 빗대어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판장이 자신을 번거롭게 하니까 과부의 청을 들어 준 것처럼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고 번거롭게 할 정도로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고 해 버리면, 결국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과 같은 의미로 해석해버리는 크나큰 우를 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7절에서 ‘하물며’라고 말하는 것은 불의한 재판장도 이렇게 할진대 하나님은 그보다 더 하지 않으시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의한 재판장도 거절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과부가 호소한 원한 문제입니다. 과부는 재판장에게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번거롭게 하기 때문에 원한을 풀어 준다고 합니다. 이상한 것은 불의한 재판장이 단지 과부가 번거롭게 한다고 해서 그 청을 들어 줄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재판장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원한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원한이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을 번거롭게 해도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원한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당한 원한 문제에 대해서는 불의한 재판장이라고 해도 거절하지를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들의 정당한 원한을 외면할 리가 있느냐는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중심은 끈질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호소할 수밖에 없는 원한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한은 나 개인이 세상에 대해서, 또는 누군가에 대해서 갖고 있는 원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원한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개인의 원한을 풀어 주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세계는 매일같이 복수혈전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원한을 빼버리면 도대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원한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죽인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감으로써 발생할 수밖에 없는 원한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물론 성인으로서의 예수님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한 분으로 여기고 그 사랑을 배우자는 의미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내 놓으면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이 추구하고 높이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볼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십자가 복음을 가진 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고, 그 고난이야 말로 신자에게는 원한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한을 하나님께 호소한다면 하나님이 그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원한을 풀어주신다는 것은 마지막 때 세상을 심판하심으로써 무엇이 진리이고 생명인가를 선명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어리석게 보였던 믿음과 복음이 참된 지혜였음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겠습니다. 신자는 바로 그 때를 기다리고 소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드러난 마지막 때의 세상을 생각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질 세계를 생각하고 그 세계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항상 기도하면서 낙망치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기도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믿음을 얘기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를 노아처럼 살게 합니다. 세상을 보고 세상 속에서의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말씀 안에서의 자신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노아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루실 세상을 보게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결국이 어떠한가도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하게 하고,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현실이 힘들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이루실 그 때를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고, 보이는 헛된 현실이 아닌 보이지 않는 참된 현실을 바라보는 자로 살게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자꾸 세상과 친밀해지고 싶어 하는데 믿음은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민감한데 믿음은 보이는 것은 모두 사라질 것에 불과할 뿐이고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 참된 세계임을 쉬지 않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이를 때까지 낙망치 않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