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8강 2009.7.12 설교)

빌 3:7-9  믿음의 주체


믿음은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변화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인한 인간의 변화는 행함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게 되는 변화를 뜻합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살아왔지만 믿음이 있은 후에는 자신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고, 살게 한 다른 전능자가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과 노력을 의지했던 교만을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인해서 행함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즉 행함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를 보면서 사과가 열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과를 맺어야 한다고 소리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행함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무엇을 행하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믿음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믿음을 알지 못하고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믿음에 자신을 맞춰가려고 하는 오류만 계속 자행될 뿐입니다. 행함을 강조하면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곧 믿음이라고 가르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믿음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행함, 실천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믿음은 행함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증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구원 받기 전에는 죄가 주체가 되어 죄에 끌려가는 삶을 삽니다. 죄에 끌려간다는 것은 악한 행동을 하며 산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됨과 성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삶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후에는 죄가 아니라 성령이 주체가 된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체가 된 삶은 착한 행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죄를 알고 십자가만이 생명의 의라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성령이 주체가 된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인한 신자의 변화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주체가 된 신자는 세상을 보는 시각 또한 달라집니다.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령이 오기 전에는 세상을 사는 힘이었고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던 것들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모두 해가 되는 것으로, 그리고 배설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의 것은 유익한 것이었고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한 바울에게 누군가가 세상의 것은 모두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고 한다면 그 말을 순순히 인정하려고 하겠습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바울의 시각은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이 함께 함으로 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것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전에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로서 율법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오히려 사라져야 할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을 멸절하기 위해 열심을 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바울은 오직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고, 자신의 생각에 의로우면 곧 선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안후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지식도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변화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실천의 결과가 아니란 것입니다.



9절을 보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알게 되고, 자신에게 유익한 것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보게 되는 것을 의로운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의는 바울이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이 주체가 되어 나타난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주체가 되어 성령에 이끌려 가는 삶의 증거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로 돌려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오해하게 되면 자신에게 믿음이 주어졌으니 그 믿음으로 선한 일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말씀하는 선과 인간이 생각하는 선이 다른 것도 문제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자가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 없음을 알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오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믿음으로 인정받는 세계는 믿음의 세계가 아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더 이상 율법을 이루고 실천할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율법을 기준으로 한 심판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모든 것을 이룬 자로 여김 받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보면 분명 율법을 실천하지 못하는데 율법을 다 이룬 자로 여김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누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공로에 우리도 연합되어서 의로 여김 받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있을 뿐, 우리의 실천이 요구되고 실천에 의해서 믿음이 인정되는 것은 예수 안의 세계가 아니라 율법의 세계일뿐입니다.



예수 안의 신자에게 있을 것은, 성령이 이끌려서 평생토록 예수님의 의와 은혜가 증거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주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주의 일을 스스로 찾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선악과 기준이 발동하여 주의 일다운 일을 찾으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한다고 인정할만한 큰 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주의 일에는 큰 일, 작은 일의 구분이 없습니다. 가정 일을 하면서도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산다면 그것이 곧 주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마음껏 사용하시면서 주의 의와 공로가 증거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 사는 문제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뜻대로 우리를 다루실 것이고, 따라서 가난하든 부하든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를 잊지 않는 자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를 이러한 신자로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인데, 이러한 관계에서 과연 신자가 실천하여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마리아는 그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며 하나님의 일이 부당하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마리아의 몸을 사용하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은 하나님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단지 마리아에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통보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마리아 자신에게는 이웃과 남편에게 부정한 여인으로 비춰지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예상한 마리아에게 그같은 하나님의 일은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듣고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절)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누가 이러한 고백을 하게 했겠습니까? 당연히 성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순종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로 하여금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십시오’라는 복종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종을 과연 신자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의 주체가 되어 다스린 결과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것과 순종하게 되는 것 까지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실천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고, 우리를 어떻게 어디로 이끌어 가시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려움과 실패에서도 신자가 소망해야 할 것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