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1강 2009.8.2 설교)

몬 1:4-7  믿음의 교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때 세간에서는 ‘고소영’이라는 말이 유행되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의 구성원들 가운데 고려대출신과, 소망교회 출석 신자, 영남 출신인들이 많은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맥이라고 부릅니다.



이 인맥은 사회생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인맥을 갖고 있느냐로 그 사람의 능력이 증거되고 과시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필연코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교회만큼은 이러한 인맥으로 인한 인간관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같은 고향, 같은 학교라는 인과관계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인간의 혈통과는 무관한 세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한 혈통을 따라 태어난 사람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계는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조차도 부인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면 같은 지역, 같은 학교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관계 안에서 지체라는 한 부분으로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는 같은 교회, 같은 지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가 생명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백성들로 구성된 관계일 뿐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교제의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신자의 교제입니다. 교회의 분위기가 신자의 교제가 활발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되고, 또한 교회의 분위기는 교회의 부흥과도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목사는 자연히 신자의 교제가 활발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교제가 활발하다는 것은 대개 함께 잘 어울리고, 이런저런 모임도 많이 가지고, 신자들끼리 굳게 뭉쳐 있는 그런 모습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한마디로 단합된 관계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신자가 자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친분을 쌓는 것이 곧 신자의 교제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의 교제는 그런 인간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 취미가 맞고 성격이 갖고 생각이 같으면 자연히 가까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제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또한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조그만 일로도 금방 서먹해지고, 그동안 맺었던 관계를 청산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신자의 교제를 어떻게 세상의 인간적 관계와 같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신경에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는 내용의 고백이 있습니다. 성도의 교통, 즉 교제가 신앙 고백의 내용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참된 교회에서는 빠질 수 없는 믿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자의 교제가 실천의 문제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로 언급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대개 생각하는 신자의 교제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부분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고백 다음에 성도의 교통이 나오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믿사옵나이다’라는 고백으로 마칩니다.



 결국 이 내용은 성도의 교통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성령께서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서로 교통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문제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라면, 분명 인간적 친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인간적 친분관계를 이루는데 굳이 성령까지 개입하셔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가 생각하는 신자의 교제는 거의 인간적 친분 관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친분관계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 교회의 화평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은혜롭게’라는 명분으로 잘못된 것과, 아닌 것에 대해서도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면 그는 교회를 흔들고 훼방하는 존재로 낙인찍히게 되고 결국 ‘출교’라는 명목으로 쫓겨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교통이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인간적 친분관계에서는 없는 다른 본질적인 것이 있어야 교제로 일컬음 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동일한 고백과 감사가 있고, 함께 주님만을 섬기고 십자가만을 자랑하자는 같은 뜻과 마음으로 함께 할 때 그것이 진정한 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교제는 성령으로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살고자 하고, 내가 아니라 예수님만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발생할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그리스도로 인한 하늘의 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6절의 내용은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인한 하늘의 복이 더욱 풍성하게 증거되고 나타났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신자의 믿음의 교제는 인간적 친분으로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과 은혜로 풍성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교제는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복을 서로 나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얼마든지 함께 모이고 어울리는 친분적 관계를 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을 서로 나누는 것이 없다면 신자의 교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의 모임일 뿐입니다.



믿음의 교제로 그리스도의 복과 은혜가 풍성해진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0절에 보면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쳐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바울이 ‘갇힌 자 중에 낳은 오네시모’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오네시모 때문인데,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예전에는 무익한 자였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한 자니 받아들일 것을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유익한 자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예수를 믿은 후에 뭔가 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누구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유익한 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다는 그것으로 이미 타인을 유익하게 하는 존재로 새롭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도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유익한 자로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주인과 종의 신분이고, 도망친 종은 죽임은 당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과 주인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체로 만나는 것이고,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교제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친분관계를 가진다고 해도 세상의 것이 기준이 된 벽이 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는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힘없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교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를 증거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으로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사회적 기준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유식과 무식과도 무관하고, 생김새와도 무관합니다. 세상의 모든 조건을 떠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은 신자라면 누구나 그 은혜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도 가능하고 노인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라고 해도 어른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교제에는 세상의 어떤 기준도 벽도 없습니다. 다만 한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분 예수님을 알게 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하나 됨이 확인되는 것이고,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믿음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는 내 마음에 들고, 내 생각과 같고, 취미나 성격이 같아서 서로 친해지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당을 짓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의 세계 밖에서만 나타나는 현상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이런 분위기의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조급증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한 것이 여러분 각자의 결단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부름을 받았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만나게 하신 것은 은석교회를 부흥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고백으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것이 믿음의 교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