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10강 2009.5.17 설교)

롬 3:27-28  믿음과 행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려울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둘 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이나 행함 둘 다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생각하는 믿음과 행함이 따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과 행함의 의미가 아닌 인간이 구상하고 생각하는 믿음과 행함이 따로 있기에 사실 인간에게 믿음과 행함은 그리 어려운 문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하기 나름이고, 조금만 의지를 가지고 열심을 내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말씀대로 행하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실패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가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보다는 행함이 좀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신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지만 행함은 직접 몸으로 실천을 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을 자신의 삶에 하나님을 믿는 문제를 하나 추가로 삽입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믿음은 기존의 삶에 하나님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삶을 치워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존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용납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기존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기존의 삶의 방식, 즉 옛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내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날 위해 사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게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영광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위해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삶이, 이러한 믿음이 우리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행함이라는 것도 겨우 착한 일을 하고 교회 일에 힘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보고 기도하고 고아원에 조금 기부한 것으로 말씀을 행한다고 입 밖에도 꺼내지 마십시오. 그러한 행함에 대해 세상은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우리는 너희들보다 더 잘한다’고 말입니다.



신자의 행함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새 사람답게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 사는 것이 행함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행함은 넘어지고 실패하고 고통이 있는 형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쁨과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이 우리 힘으로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까?



이처럼 믿음도 행함도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함은 믿음의 능력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이든 행함이든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믿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7,28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교회는 ‘신자에게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7)이라는 야고보의 말처럼 믿음에는 행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행함이 없이 말만 있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세상의 것으로 힘을 삼는 것은 믿음이 아니며,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자기보다 약자를 무시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행함을 자기 의로 삼고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그 믿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분명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생각하고 있는 행함이 어떤 것인가?’부터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행함이 아닌 것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보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교회에서 말하는 행함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성경보라, 기도하라, 헌금하라, 교회에 봉사하라, 헌신하라, 착한 일도 하라,  이러한 말들이 교회가 말하는 행함의 전부입니다. 기독교인이 생각할 때는 이러한 것이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증거물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외식하는 인간의 종교 활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 1:11-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인간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제사의 의미는 관심이 없이 다만 제사라는 종교 형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유지하겠다는 그 생각이 악했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성경 보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보는 자신을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 인정하려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헌금을 하면서 헌금하는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서 나오는 인간의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여기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함이 믿음의 증거물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함으로 믿음으로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목사가 교회를 바라보면서 발생하는 욕망의 결과인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곧 목사 자신이 커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커지고 싶은, 그래서 이름이 드러나고 힘이 있는 목사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이 목사로 하여금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게 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외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으로 우리의 믿음이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포기할 수 없어서 성경까지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으니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행하든 그 행함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행함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가질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함이 가치가 없고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면 행해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행했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한 행함이었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행함이었을 뿐이고, 따라서 그 행함을 가지고 믿음의 증거물이라는 말은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증거물, 신자다움, 이것은 우리의 머리에서 나오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분명 성경에 믿음의 사람이 살았던 그 삶이 증거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살았습니다(고전 2:2). 이 말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영광을 받거나, 교회를 크게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도 됩니다. 이처럼 바울의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으로 채워져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믿음의 증거물이고 신자다움이었습니다.



바울의 믿음의 증거물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많은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믿음의 증거물이라면 우리도 바울처럼 가정, 직장 다 버리고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행할만한 것만 선택적으로 골라 담아서 그것을 실천하겠다고 하는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도 행함도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주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서 나온 행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함께 했던 성령의 역사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알았기에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길을 가게 합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진심으로 참되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알게 하시고 그것에 우리 마음을 두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자의 행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이든 행함이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나에게도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를 자랑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