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9강 7월 19일 설교)

롬 12:3-5  믿음의 분량


롬 15:1절의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내용처럼 성경이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에 대해 말씀하는 것 때문에 믿음에도 크고 적음의 분량이 있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믿음이 강한 것은 믿음의 분량이 많기 때문이고, 연약한 것은 분량이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이 자라야 한다고 하면서, 믿음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삶의 수칙들을 제시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믿음에 크고 적은 분량이 없고 모든 신자가 동일한 분량의 믿음을 받았다면 똑같은 믿음의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 모든 신자가 동일한 믿음의 결과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처럼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십자가의 한편 강도처럼 구원은 받았지만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상식으로 사도 바울이나 그 강도의 믿음이 동일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적고 많음으로 구분하면서 믿음의 분량이 큰 사람이 많은 일을 하고 그에 따라 천국에서 받는 상이 크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에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한 가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자의 믿음은 동일하지만 일치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함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로우심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종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순종을 최고의 순종으로 믿기 때문에 별도로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고 이러한 믿음에 있어서는 모든 신자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모든 신자의 삶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사도들이 똑같은 형편에서 똑같은 결과를 남기지를 않은 것과 같습니다. 사도들의 삶도 다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길에 서게 된 것은 동일하지만 복음이 동일한 삶과 동일한 형편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저기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여러 교회가 세워지는 결과가 나타났지만, 모든 사도에게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과는 다르게 바돌로매, 안드레, 다대오, 야고보 등의 사도들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이름이 거론 될 때 언급되는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야고보는 일찍 순교를 해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들을 소위 업적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 믿음의 분량을 나누고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업적이 기준이 되어서 천국에서 받는 상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3절의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구절에서도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분량을 양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분량이라는 말의 의미를 양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신자마다 믿음의 양이 다르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 믿음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봄으로써 믿음을 키워야 하고, 믿음이 커야 강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 신자에게 주어진 믿음이 분량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분량을 양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양의 믿음의 주셨다는 것이 되고, 따라서 작은 양의 믿음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적게 봉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적은 양의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는 핑계도 가능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의미로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을 하는가는 4,5절의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하나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지체는 여럿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체는 서로 다양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동일하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믿음이 증거되는 삶은 동일하지 않고 서로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믿음은 동일하지만 일치는 아니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도들의 믿음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사도들을 동일한 삶으로 이끌어 간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삶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동일하지만 야고보는 예수님 때문에 일찍 죽은 반면에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한 것처럼 그 삶은 다양했던 것입니다.



6-8절을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분량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이 한가지의 모습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만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처럼 설교를 하는 것만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주어진 다양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하는 일을 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지체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지체들 신발을 정리해주는 그 마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은 증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가 가장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받은 은사가 모두 같지 않습니다. 은사는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은사가 더 낫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어진 은사로 형제를 유익하게 하는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는 다양하지만 한 몸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은 동일하고, 그 마음으로 각기 주어진 은사로 봉사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모이는 것이 일치이고, 각기 주어진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은사를 고르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은사를 원할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거나,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그런 은사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섬기고, 가르치고, 구제하는 그런 은사를 누가 선뜻 환영하겠습니까? 그러한 은사는 모두 자신의 수고를 요구하는 것들이기에 가능하면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방법을 통해서 영광돌리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죽을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 지내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죽는다고 해도 예수님의 의가 나를 생명의 나라에 있게 할 것이니까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기뻐하고 예수님을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다가 일찍 죽는 것을 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길을 정하시고 그 길에서 신자로서의 할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두고 믿음의 분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믿음을 키워서 큰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주장되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삶은 그 형편과 환경을 떠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엡 4:7절에서도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는 말씀처럼, 모든 삶이 분량대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병에 걸려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면 그 또한 예수님의 선물의 분량대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에는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은혜를 육신을 기준으로 해서 좋다, 나쁘다고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선물을 선물로 받지를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오직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선물로 인정하려고 할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악함이 나의. 죄 때문에 저주의 자리로 내려가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의 악을 보게 하시고, 저주 자리까지 내려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도록 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따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량대로 가게 하신 길에서 다만 예수님을 좇을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누구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보게 합니다. 이 믿음 안에서 신자는 하나라는 관계로 모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