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4강 6월 14일 설교)
롬 14:1-3 믿음의 약함과 강함
대개의 신자들은 믿음을 ‘강함 믿음’ ‘약한 믿음’으로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그리고 강한 믿음은 어려움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시험도 이기고, 교회의 봉사에도 열심인 그러한 모습으로 인식을 하고, 반면 나약한 믿음은 조그만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고 주저앉아 버리고 교회에도 소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강한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하기도 하지만 사실 ‘강한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신자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강한 믿음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애당초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인데 이 믿음을 인간이 키울 수 있다거나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대단한 착각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약한 믿음을 주시고, 누구에게는 강한 믿음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믿음을 자신이 게을러서 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강한 믿음은 인간의 열심의 결과입니까? 그 어떤 말도 성경과는 맞지 않습니다.
1,2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고 말합니다.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대해 언급을 하면서 먹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채소만 먹든 무엇을 먹든 그것은 식성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연약한 믿음과 연관하여 말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그 배경에는 당시 로마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 채소만 먹는 것과 고기를 먹는 문제로 인해 분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금욕주의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우상을 섬기는 로마에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가 시중에 유통되었고, 그 고기를 거절하여 먹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보기에 따라서는 고기를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이 좋은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왜 고기를 거절하고 채소만 먹는 것이 믿음이 연약한 것이 될까요?
고기를 거절하는 것은 식성의 문제가 아니라 경건의 문제였습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음으로써 자신이 부정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젊은 분들은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이라면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 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일까요? 바울은 지금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고기를 먹지 않아서 믿음이 연약하다면 믿음이 강해지려면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강함과 약함은 고기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으로 구별되는 것입니까? 누구든 우상에게 바친 고기라고 해도 거리낌 없이 먹으면 다 믿음이 강한 것입니까?
바울은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우상 제물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내용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는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깨끗함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죄 없다,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습니다. 거룩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거룩함은 예수님의 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더러움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예수님에게 부름을 받을 때 더러운 자 그대로였습니다. 그런 인간이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써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은 그대로인데 예수님의 거룩한 피가 모든 더러움을 덮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함으로써 거룩하다 일컬음 받는 신자를 또 다시 더러운 상태의 신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 그리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신자는 더러운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채소만 먹는 것이 연약한 믿음이 되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기에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멸망으로 밀어 넣을 수 없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 연약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믿음의 강함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는 믿음이 강한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는 것이 믿음이 연약한 것이라면, 반대로 고기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이 강한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라는 말을 하기 때문에 믿음의 강함은 모든 것을 먹는 것이라는 생각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강한 믿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연약한 믿음과 강한 믿음이 채소만 먹고 모든 것을 먹는 문제로 구별된다면 좀 우습지 않습니까?
1절을 다시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당시 로마교회에는 먹는 문제로 인해서 분란이 있었고, 서로를 비판하는 관계에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부정한 자들이라고 비판했을 것입니다. 또한 고기까지 먹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비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채소만 먹는 것을 믿음이 연약한 것으로 말한다면, 믿음이 강한 것은 고기까지 먹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믿음이 강하다면 다른 말로 믿음이 좋다는 뜻이 되는데, 믿음이 좋은 사람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비판할 수 있을까요. 서로를 비판했다면 똑같은 자일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의 강함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채소만 먹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고 비판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믿음에 거하는 신자는 타인을 비판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예수님께 비판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예수님의 은혜가 그 모든 비판을 덮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판을 받아야 할 자신을 예수님의 은혜가 붙들고 있음을 안다면 그 믿음은 타인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하다 강하다는 것은 서로 비교하고 높고 낮음을 정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해서 ‘나는 너보다 믿음이 강하다’고 하면서 연약한 자를 자신보다 낮은 믿음의 사람으로 본다면 그것이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는다는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 앞에서 자신 또한 그의 믿음을 비판할 자격이 없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는 강한 믿음, 너는 연약한 믿음’ 이런 구별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믿음에 있어서는 연약한 자일뿐이고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믿음의 길을 한발 한발 걸어가고 있을 뿐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는 것입니다.
강한 믿음은 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강함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의 강함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비록 죄가운데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 말이 악을 행해도 된다는 의미로 들리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붙들린 신자는 악을 미워하게 됩니다.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 악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힘써도 자신의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없는 나약함을 절감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더욱 깊이 강하게 깨달으며 감사하게 될 뿐입니다.
주만 바라보는 믿음은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의 여부에 따라 흔들림이 없습니다. 종교적이 행함이 많을 때는 자기 믿음에 대해 안심하고, 행함이 적을 때는 불안해하는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나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이 나를 붙들어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가 자신을 부정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되기에 연약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행하심만 믿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을 보면서 믿음을 저울질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뭘 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자신을 의롭게 했음을 믿을 뿐입니다.
3절을 보면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받으시는 일에는 외적인 조건이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조건을 보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닌데, 우리가 형제의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를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주만 바라보는 것, 그리고 주님의 의의 행함만 의지하는 것이 믿음의 강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