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믿음(갈 4:12-20) - 10강

사람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인간적인 관계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도, 출세를 위해서도 인간적인 관계는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라면 멀리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가까이 하게 됩니다. 오늘 비록 친구였다고 해도 내일 나에게 해가 된다면 멀리하게 됩니다.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만약 저 사람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저 사람이 있어야 내가 세상에서 출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자존심까지도 굽혀가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이 더 좋은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을 사는데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쉽게 마음을 돌려버리고, 다툼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관계의 모습입니다.

교회에도 이런 인간관계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한 인간 관계가 아닙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여있는 관계입니다. 교회의 이 인간관계를 이해하고 모인 것이 참된 교회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단지 인간들의 단체로만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세상적인 인간관계가 난무하고, 시기와 분쟁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일이 잘 되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교회에 오는 자는 결단코 신자가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가 어려움에 빠질 때 도와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편에서 세상에서 도움 받는 것을 목적으로 교회를 찾는 것은 결코 신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신자와 신자와의 관계, 목회자와 신자와의 관계가 얽혀 있는 곳입니다. 사실 얽힐 관계도 아니지만 세상적인 인간관계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얽히고 얽힌 관계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목회자와 신자와의 관계는 성경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는 모습이 너무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에서 보여지는 목회자와 신자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관계입니다. 목회자는 신자를 이용해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신자를 접근합니다. 즉 신자를 잘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자신의 목회에 도움이 되는 일꾼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주님의 교회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상은 목회자인 자신이 주인으로 되어 있는 가운데 그 교회를 크고 위대한 교회로 만들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힘있는 목사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자신의 교회를 찾아온 신자들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사는 성경도 복음이라는 명목 아래 자신의 욕망을 도와주는 쪽으로만 해석을 하게 됩니다. 결국 성경을 이용해서 신자들을 꼼짝못하도록 만들고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들이 목사의 말에 반박을 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쯤으로 아는 대단한 착각 가운데 목사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자신이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가 목사의 말을 듣는 것도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한 수단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서로 협조를 잘하지만 반대로 서로에게 방해가 될 때는 멀리하고 끊어버리는 세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신자가 목사의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질 때 자신의 단체에서 몰아 내버립니다. 또한 신자의 입장에서 목사가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가차없이 자신들로부터 나갈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목사는 자신의 생존 문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하나 점검해서 만족시켜주는 목회를 해야 하고, 신자들은 그러한 목사를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관계, 교회의 모습은 오늘에 보여지는 새로운 모습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도하면서 교회를 세우던 그때에도 보여지던 모습입니다.

우리는 천지창조때부터 보여지던 인간의 죄악된 모습이 지금에도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인간의 핏줄을 따라 본성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 누구도 아담의 죄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인간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인간관계로만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바울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느냐, 아니면 바울이 가지고 간 복음을 보느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느냐에 따라서 사도를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지 않고 바울이 들고 간 복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문제를 바르게 하지를 못합니다. 물론 지금 목사가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를 목사로 비유할 때 지금의 많은 교회들이 목사를 보는 눈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들어줄 수 있느냐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교인을 잘 교육시켜서 일꾼들로 만들 수 있는가? 이런 여러 가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인가 교회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복음인 것을 알고 복음만을 본다면 그것이 바른 교회이고, 사람을 본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도 복음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교회를 찾았고, 교인도 복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 교회를 부흥시킬 사람을 찾았다면 이들의 만남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싫어하고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면서 지금의 믿음을 칭찬해주고 열심을 독려하는 말만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 편에서도 자기들을 난처하게 하는 말은 하지 않고 편안한 말만 해주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니까 마음놓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나 할 것없이 지금의 대부분의 교회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의 모습은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14절에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가지고 판단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약함, 즉 볼품없는 모습 그대로 갈라디아 교회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외모야 어떻든 그들은 바울은 환영하고 영접했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14,15절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복음을 원했습니다. 순수하게 복음만이 자기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고 복음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합니다. 처음에는 복음만을 원했고, 복음을 영접했는데 나중에는 그 복음을 도리어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을 외면하게 된 이유는 17절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행위를 주장하고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더 좋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앞에서는 초등학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한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다시금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는 쪽이 처음에는 복음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고 복음만을 원하다가 인간의 본성에 맞는 세상의 초등학문에 마음을 두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쪽이 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합리적이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처음에는 복음이 좋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원했는데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복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던 믿음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이나 나중에나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알기 전의 그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갈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처음 주님을 믿을 때의 그 마음, 그 모습이 그대로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처음 그 사랑이 있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신자는 처음도 나중도 내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를 세상으로 이끌어 가는 복음 아닌 복음은 거부하고 오직 십자가로 인도하는 복음만을 마음에 두면서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