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자(갈 4:28-31) - 11강

오늘 오전에 종교열심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신자가 종교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한가지 착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열심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열심, 성경 보는 열심, 헌금하는 열심, 이런 것들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믿음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현재의 열심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헌데 만약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나, 모임에 참석하는 정도, 기도하는 시간, 헌금하는 것, 이런 것들이 스스로 만족이 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즉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보충하기 위해서 예배 참석의 횟수를 늘이게 되고,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하게 되고, 모임에도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고, 헌금도 더 많은 액수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자유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법에 매여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교회라는 눈에 보이는 단체에 매여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교회에 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지금 신자들이 신앙생활하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전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를 향한 열심이 여러분을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니까, 내가 장로니까, 내가 권사니까, 내가 집사니까 뭘해야 한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직책에 매여있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목사가 하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들은 가만히 두면 게을러지기 때문에 날마다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계속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소위 교회 분위기를 뜨거운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열심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주님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신자들을 이용하고자 자기 멋대로 법을 내세우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힘을 믿고 움직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교회입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있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육체를 따라 난 자를 '계집종의 자녀'라고 하고, 성령을 따라 난 자를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에서는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계집종의 아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계집종의 아들은 무엇이고, 계집종의 아들은 왜 유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부인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부인의 이야기를 비유로 해서 누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자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부인은 종의 신분이었던 하갈과 자유자의 신분이었던 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둘의 신분을 비유를 해서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갈에게서 태어난 아들, 즉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났다고 하고,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삭을 성령을 따라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따라난 아들은 내어 쫓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체로 난 것은 무엇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살이 가까워지도록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갈이 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보고자 한 증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즉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보고자 하는 열심을 가리켜서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가 이삭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을 따라 나지 아니한 아들, 즉 인간의 혈통을 따라 나지 아니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났지만 아브라함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난 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와 같이 성령을 따라난 자만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브라함같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이 죄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율법도 자신의 노력으로 지켜서 천국 가는 방편으로 삼아버렸던 것입니다. 스스로 율법 아래 매인 자가 되어 버렸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또 다른 법을 만들어 내고 그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의 증표를 찾고자 합니다. 믿음이 있는 증거는 뭔가 달라지고 보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그 약속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었지 자신의 노력으로 약속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었던 것 같이 믿음의 증거는 말씀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열심을 가지고 스스로 믿음의 증표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스마엘을 만들어 내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나게 하는 것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목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누가 종의 아들이고, 누가 자유자의 아들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면 됩니다. 성령을 따라난 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육신을 따라난 자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살면서 종교적인 열심을 통해서 복을 얻어내고 천국에 가고자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멋대로 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붙들려서 움직이고,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하는 것은 여러분을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할뿐입니다. 자유자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