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갈 5:1-6) - 12강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 은혜와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한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은혜요 사랑이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머리에 담긴 지식으로 그쳐버리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것을 무엇을 알 수 있냐면 자신의 신자됨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행위를 가지고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자가 안다면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신앙을 확인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신자라는 것을 자기의 신앙 행위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와 사랑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내세운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만한 신앙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간편에서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에 미달할 때 신앙이 부족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법에 매여 사는 모습입니다.

신앙 생활을 기쁨으로 즐거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법에 매여서 하는 것입니다. 물론 법에 매인 신앙 생활에도 기쁨과 즐거움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즐거움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기쁨이 아니고 신앙의 법을 지킨 자기 성취에 대한 기쁨이 만족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은 자유함에 대한 훈련보다는 신앙의 법에 대한 훈련이 너무 잘되있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묵상을 조심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묵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묵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좋은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앙의 기준을 성취하기 위하여 묵상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어떤 기준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신자는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고 말할지라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와 같이 법에 의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나아갈 때 그 교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획일화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신앙 생활을 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자로 사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는 그 어떤 법도 효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6절).

여러분, 그리스도안에서는 그 어떤 법도, 신앙의 기준도 효력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표로 삼았던 할례도 그리스도안에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합니다. 할례도 효력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법도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가 어떤 기준을 정해서 그것을 지킬 것을 신자들에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잘못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니까 기도해야 하고, 신자니까 예배드려야 하고, 신자니까 헌금해야 한다라는 것은 기도, 예배, 헌금 등을 신자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됩니다. 즉 기도, 예배, 헌금이 은혜와 사랑이 아니라 법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예배에 빠진다는 것 때문에, 헌금을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상대방을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아도 정당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법으로 하느냐 은혜와 사랑으로 하느냐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한가지나 몇 가지 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을 보면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또 다른 법, 법 모두를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없기 때문에 4절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합니다. 즉 법을 지켜서, 신앙의 어떤 법칙을 지킴으로서 신자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천국은 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사랑이 있을 때 천국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이란 친절이 아닙니다. 사람을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서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법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인다는 것은 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가정 또한 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부터 법에 매이지 않고 사랑에 붙들린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남들이 자기에게 하는 행동을 가지고 교회의 사랑의 유무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내가 남에게 사랑을 가지고 다가갔느냐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내가 받는 것이 있어야 베풀려고 하고, 또 조건없이 베푼다고 해도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베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신자들입니다. 여러분 한사람이 이 주님의 사랑을 이해한 가운데 그 모습을 교회에서 보인다면 그 교회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법으로 자꾸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열심을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복을 받기 위해서 열심을 보여야 하고 그 열심을 신자의 기준을 열심히 지켜서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피곤할 뿐입니다. 짐이 되고 억지가 되고 기쁨이 없습니다. 설령 필요했던 것이 주어진다고 해도 또 다른 필요한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 피곤이 이어지고, 불만이 이어질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법을 지키고 신앙의 기준을 행하는 열심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명분있는 종교 열심을 가지고 모인다고 해도 그것은 책망의 도구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법이나 어떤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용납과 용서하는 사랑으로 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남이 나를 돕는 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먼저 남을 돕는 자로서 나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남이 사랑이 있는 자가 되기를 바라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먼저 남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런 교회만이 천국을 보여주는 교회이고, 가정과 같은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