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좇아(갈 5:16-17) - 13강

지난 시간에는 신자가 어떤 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신자가 어떤 법적인 기준을 선호하는 것은 교회서 제시하는 몇 가지의 기준을 지킴으로 신앙 생활의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삶의 전체를 신앙생활로 강조하는 것보다는 몇 가지의 기준을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것으로 세워서 그것을 지킴으로 신앙생활을 완성시키는 것이 신자에게는 부담이 가지 않고 아주 편안한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적인 기준을 원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모든 판단을 그 기준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법적인 기준을 가지고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서 하루에 성경을 5장을 보자라고 했을 때 5장을 보는 사람은 신앙이 좋은 것이 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신앙이 좋지 않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들을 아주 싫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법적인 기준에 매이지 말고 자유자로 살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에게 성경의 말씀을 따라 자유자로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권유합니다. 법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는 그 훈련이 여러분에게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유자로 신앙 생활하라고 하면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합니다(13절). 즉 자유라고 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 자유가 남에게 해가 될 때는 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의 새로운 의미를 제시합니다. 즉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13절)입니다. 자유란 사랑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랑이 자유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우상 제물의 문제에서 제물을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우상 제물이 죄냐 죄가 아니냐를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신앙의 지식으로 인해서 자유함을 가지고 거리낌없이 우상 제물을 먹는 자들에게 신앙의 지식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 그 자유를 절제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합니다. 즉 나에게 종교적인 행위가 있으면 '나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을 말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쉽게 나는 성령편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자로서 성령의 편에 서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물어야 할 것은 성령의 편에서 살고 있느냐 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령의 편에서 사는 것입니까? 종교 의식 행위가 성령의 편에 있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과연 무엇이 내가 성령의 편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16절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편, 즉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성령의 좇아가는 사람이다고 합니다. 성령을 좇는다는 말은 법이나 어떤 규칙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알고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내 기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뭘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들은 온통 내 기쁨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지 내 기쁨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겠다는 믿음은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 편에 서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 편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령을 좇지 않는 자는 하나님 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편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내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편으로 사는 자의 하나님이시지 자기편에서 사는 자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시편 118:6,7을 보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가 내 편이라는 것은 이 시의 저자가 이미 여호와의 편이 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자는 이미 자기의 기쁨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는 이런 자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 도움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오셔서 모든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 도움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에서도 원수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시는 도움을 말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 편으로 살아갑니까? 성령을 좇아 살아갑니까? 여러분의 예배와 기도와 설교 듣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있습니까?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17절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따라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모든 삶이 움직여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하도록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하고 싶어하는 것을 성령이 내안에서 거부합니다. 내 힘으로는 거스릴 수 없는 것을 성령이 내 안에서 거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싸움이고 갈등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싸움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까? 그 싸움 속에서 자기의 것을 조금씩 포기해 가는 모습이 있습니까? 그런 싸움이 있음으로 기뻐하시고 언제나 하나님 편으로 자신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나님 편으로 서고 싶은 자기의 소원을 아뢰며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편으로 사는 것이고 성령을 좇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갈급함 마음이 되기를 구하십시오. 세상에 대한 갈급한 마음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갈급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행동을 하실 때 먼저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일의 결정을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편에 서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늘 찾아가며 성령을 따라 살고 여호와의 종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