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법(갈 6:1-5) - 15강

지난 시간에는 신자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신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것은 직장도 그만두고, 학교도 그만두고, 가정도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조건과 환경들이 나의 육신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알고 그것을 삶의 방향으로 삼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면 과연 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가 분명합니다. 결국 주님은 우리의 삶을 돕고, 내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잘되어 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행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이제는 우리를 통해서 계속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대로 나의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범죄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은 범죄가 시험으로 인해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지 아니한다면 범죄가 없습니다. 범죄가 없다는 것은 죄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본성에 의한 열매가 시험으로 인해서 열매로서 보여지게 되는 것을 범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내부에는 언제나 육체의 일을 따르고 싶어하는 흔들거림이 있습니다. 그 흔들거림이 평소에는 자신의 억누름에 의해서 외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시험이나 유혹이 미쳤을 때 평소의 흔들거림들이 실제 행동화되어서 외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범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신자가 모이는 곳이니까 모두가 깨끗하고 선하고 싸움도 없고 다툼도 없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용서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번으로 끝난 용서가 아니라 교회로 모일 때마다 용서 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죄를 무조건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모여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보다는 육체의 일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 내에서 범죄 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절에 보면 그러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는 범죄한 자를 위해서 신령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범죄한 사람에게 죄에 대한 권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에서 범죄한 자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신자는 교회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가 신령한 신자, 즉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주님만을 사랑하고 성령으로 살기를 힘쓰는 신자가 왜 필요하느냐면 시험과 유혹에 의해서 범죄한 형제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신령한 신자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범죄 함만 보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하나 죄를 지적하고 권유할 사람이 없어지고, 또 이웃의 신앙 생활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모습으로 되어 가기 때문에 결국 교회는 교회 아닌 교회로 전락되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석교회가 그러한 교회의 모습으로 전락해도 상관이 없다면 저는 더 이상 여러분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은석교회를 어떤 이상적인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자로 부름 받은 것은 여러분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제발 그 역할을 여러분이 감당해 주기를 원해서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그리스도의 정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사랑과 섬김입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짐을 서로 지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두지 마시고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된 여러분의 지체에게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 지체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언제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령한 모습이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정신이 은석 교회에 충만할 수 있을까? 여기에 관심을 두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4:11,12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맡은 모든 일도 자기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역할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자유라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몽땅 내가 이웃에게 할 일만 있지 이웃이 나에게 해 줄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랑이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결과입니다. 남이 나에게 한 일을 나의 자랑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4절의 말씀은 일한 것을 자랑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 되는 신자는 언제나 이웃을 위해서 자기 할 일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데 두고 사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성공의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패의 인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을 성공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공이 아닙니다. 영원하지 못한 것이고, 또 인간에게 성공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인생은 그리스도의 법에 붙들려서 용서함 받은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인생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합니다. 자신의 몸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몸을 위해서만 움직인 사람은 결국 거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더 썩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에 관심을 두고 살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은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여기에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실패한 인생이 성공해 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근심과 염려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실패의 인생이 그리스도의 용서에 의해서 성공의 인생이 된 것을 감사하며 여러분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법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성공의 인생을 보여주는 신령한 신자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때가 이를 때까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