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갈1:6-10) - 2강

세상에는 진짜를 모방한 가짜가 많이 있다. 가짜는 진짜의 이름을 도용하지만 그렇다고 가짜가 진짜되는 것이 아니며 가짜가 진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도 본문을 통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복음에도 복음 아닌 것이 있다. 비록 스스로는 복음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복음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길이다. 이것은 복음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따라서 복음외의 것은 모두 생명과 반대되는 저주로 떨어지는 길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 복음이 있다.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다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은 모두 저주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기독교 말고 다른 종교는 구원이 없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안에도 얼마든지 다른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말한다. 즉 우리를 부르신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 다른 은혜를 좇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분명히 십자가의 은혜를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지 않으면 기독교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은혜가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부르신 은혜인지 아니면 다른 은혜인지에 대한 구별이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부르셨다는 것은 그냥 불러내시고 그것으로 끝났다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은 자리 이동이다. 이쪽의 자리에서 다른 쪽으로 옮김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김 받은 것인데 그 의인의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인 것이다. 결국 주님은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자리로 부르신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는 단호하게 세상에 대하여 죽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을 두려움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기쁨이 모두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주어지는 은혜보다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기쁨을 얻고자 하게 된 것이고, 복음 또한 세상 것을 제공하는 복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다른 복음이다.

그렇다면 복음과 복음 아닌 다른 복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10절을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한다. 따라서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게 되고 거부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진실된 복음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하는 기쁨과 하나님이 구하는 기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하는 기쁨은 모두 세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은 철저하게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쉽게 좇는 이유는 사람들의 요구사항과 일치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진짜 복음은 사람들의 요구 사항과 일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의 요구를 공격하고 부정해 버리는 것이 진짜 복음이다. 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말한다. 결국 복음이란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십자가의 은혜는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상상하는데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착각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내가 전적으로 십자가 안에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복음을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좇고 있는 복음이 분명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는 복음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에는 저주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의 기쁨을 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가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다른 복음에 불과하다. 주일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다른 복음이다. 헌금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다른 복음이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다른 복음이다. 복음은 오직 십자가이다. 신자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신자에게 세상에 대하여 죽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은 언제나 자기 몸에 집착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몸에 집착을 하는 그 본성이 우리를 다른 복음으로 끌어가게 되고 그것이 결국 저주의 자리가 되기 때문에 항상 십자가는 같이 죽을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다른 복음을 좇게 되는 것은 한가지 이유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자기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그것만이 복음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좋게 하는 것은 사단의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신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는 땅에 대한 소망에 더욱 깊이 빠져 있을 때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종교행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한 것은 다른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가장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가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시면서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구별하시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 담겨 있는 복음을 좇아가는 마음으로 복음대로만 살아가는 신자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