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약속(갈3:13-18) - 5강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모두 자기의 육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다.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살고, 육체를 위해서 일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애당초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며 살아야 할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자기의 육체를 위하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귀의 종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신자된 여러분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육체를 위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의 실체를 밝히 아는 가운데 내가 붙들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육체가 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생명이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까지 일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약속을 이루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약속 안에서만 욱체된 인간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와 약속밖에 있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약속 안에 있는 자는 약속 안에서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소망으로 살아가게 된다. 육체된 자들이 살아가는 이 땅은 인간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멸망당하고 사라지고 썩어져 버릴 것임을 알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살게 되는 것이다. 비록 몸은 세상에서 살지만 자신이 가야 할 곳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나그네' '풀의 꽃' '안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나그네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풀의 꽃으로 안개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마지막까지 내 육체를 부인하지 못하는 죄인의 모습이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주님을 믿거나 의지할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죄의 모습이 내 안에 사라지지 아니하고 나를 붙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십자가를 말하고, 십자가를 의지하고, 세상을 나그네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는 모습이다. 성령이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십자가를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다.

신자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그 자체가 고난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육체된 자들이 살아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사람들은 세상을 육체로 살지 않기 때문에 육체로 세상을 사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르게 산다는 그것이 곧 고난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세상을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가야 할 곳은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고 세상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과연 우리에게서 보여지고 있는가? 그렇지를 못하다. 육체로 세상을 사는 사람과 똑같이 그들이 가진 관심에 내 관심이 가있고, 그들이 세상의 것이 없음으로 인해서 한탄하고 슬퍼하느 그 모습이 나게게서도 보여지고 있고, 세상의 것을 가지고 으시대고 자랑하는 그 모습이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가 말씀을 통해서는 신자된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막상 세상의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그 머리 속에는 세상 문제만이 남아 있지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비리기 때문이다.

신자는 세상을 나그네로 산다. 우리가 갈 곳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 나라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육체된 우리를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살리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할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한다. 그냥 예수만 잘 믿으면 천국 가지 약속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 중심이다'는 말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갈3:6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의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후손에 대한 약속이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의 후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16절에서도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 약속은 세상의 그 무엇도 헛되게 하지 못한다. 약속이 요구하는 것은 믿음이지 율법이 아니다. 즉 어떤 법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신앙을 법적인 것으로 몰고 가고 있다. 십일조, 기도, 전도, 봉사, 헌신, 예배 이런 모든 것을 법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즉 이것을 부지런히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약속을 율법으로 훼손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친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동일하다. 그런데 만약 지금의 교회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를 열심 있는 것이나 정성으로 강조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나, 십자가의 긍휼과 자비는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가? 왜 꼭 시작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면서 마지막은 인간의 가치없는 열심과 정성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이것이 육체된 인간의 모습이다. 세상을 약속으로 살지 않고 육체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열심과 정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육체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는 것은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 우리의 행위는 그 어떤 것도 더러운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육체된 자이기 때문이다. 육체된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의의 나라이다. 거룩한 나라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죄인 된 인간에게 의가 입혀졌기 때문이다. 그 의는 우리의 힘으로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믿는다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들여보내시는 것이고 우리가 약속을 믿고 세상을 산다면 결국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그네로 사는 것,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잊지 않고 내 본향은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약속을 믿고 있는 자의 모습이다. 때문에 약속을 믿는자는 현재를 보지 않는다. 장차 내가 거할 하나님 나라, 마지막을 보고 사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세상의 삶으로 끝나버린다면 최고로 불쌍한 자는 신자들이다. 그러나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의 여러 자기 힘든 것들을 단지 고통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우리의 삶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신다. 마지막을 위해서 일하신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상을 나그네로 살고, 세상의 것은 사라지고 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세상의 것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세상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게 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삶은 마지막을 기지고 평가를 해야 한다. 마지막이 하나님의 나라로 끝난다면 그 삶은 성공적인 삶이고, 하나의 과정이었던 세상에서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결국 마지막의 선한 결과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인 것이다.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지금의 고통을 참고 이기면 하나님도 종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세상에서 다른 큰복을 얻기 위해서 지금의 조그만 고통은 참고 견디자는 의미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현재의 고통을 참고 이기는 자에게 있다는 말을 통해서 지금 어려움 중에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려고 하는 데 이것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자신의 의지를 믿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자는 마지막에 서서 현재를 바라볼 때 지금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 선을 이루기 위한 과정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 속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인정하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내가 지금 무엇을 누리고 사느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사느냐를 보지 말고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를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의도 아니고, 우리의 정성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들어간다. 그 하나님의 의는 약속을 믿는자에게 주어진다.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버린 것이다. 내 상식으로 살지 않고, 내 경험으로 살지 않고, 내 지식으로 살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을 의로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그 약속을 믿고 언제나 마지막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