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갈3:19-29) - 6강

세상을 살다보면 각자 나름대로 이것만큼은 세상을 사는데 꼭 필요하도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좋은 직장이 필요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학벌이 필요하고, 좋은 신랑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원하는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하여간 세상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고 살 수는 없다. 분명히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신을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안타까운 점은 이것이다.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고, 주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 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게 되고, 나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향해서 채워지지 못하고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 않고 덤덤하게 살아가면서, 세상에 대해서 부복한 것에는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채우지 못해서 애타하는 것이다. 세상의 것이 부족해서 애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신자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애타하는 사람이 있다. 남을 미워하지 않는 모습, 남을 사랑하는 모습, 남이 나를 보고 칭찬할 만한 모습, 그런 모습들이 자신을 통해서 보여지고자 애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이런 삶이 신자다운 삶이고 신자에게는 누구나 그러한 마음은 가지고 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 것 때문에 애타하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히 가질 마음 자세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오해하고 있고, 그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쪽에서 뭔가를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 남을 사랑하는 것을 이웃이 어려울 때 돕고, 구제하고, 남의 실수를 용서하는 등,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자신에게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자기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를 바라보는 모습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해도 그것이 구원을 얻는 근거가 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의 증거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보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값없는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값없는 구원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 편에서 정해 놓으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을 약속이라고 한다. 그 약속만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었다. 신자라면 분명히 실천해야 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에서 자유를 얻는다고 하면서 또 다시 법으로 빠져 들어가는, 스스로 올무에 매이는 것에 불과하다. 신자가 실천해야 할 것은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곧 하나님 일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다. 주님만 바라보면서 그 은혜와 사랑이 나를 가득 채울 때 우리는 내 의지와 내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움직여지는 것이다. 이것을 열매하고 한다. 내가 스스로 힘써서 맺는 열매가 아니라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이다.

죄인 된 나는 스스로는 주님이 요구하신 것을 하나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그래서 19절에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본분의 중심은 중보라는 말이다. 중보라는 것은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말한다. 양쪽이 끊겨 있는데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분을 가지고 중보자라고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다. 그 중보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셨다. 즉 하나님은 우리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이다. 하나님은 중보자를 믿는 사람만을 찾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어떤 자격을 원하시지도 않는다. 단지 중보자만 믿기를 원하실 뿐이다. 중보자를 믿는자가 신자이다. 여기에 우리의 실천이 개입할 수 없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서 믿음을 보이고,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겠다고 애쓴다면 그것은 결국은 중보자를 믿지 않는 것이 된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신자의 조건이 못되는 것은 우리는 그 어떤 실천을 해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의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겠다고 한다. 이것은 전혀 의롭지 못하고 값싼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움직여 보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 되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죄 아래 가둔다. 그 속에서 중보자만을 바라보고, 약속만을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 묵상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뭔가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에 묶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세상에서 신자답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중보자를 영접하고 믿는 것이다. 이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뭔가를 해서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쓴다. 자신이 신자라는 증거를 자신의 행위에서 확보하려는 열의로 가득 차 있다. 이 사람은 중보자를 영접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영접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 스스로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고, 그것을 증거로 삼아서 구원을 얻어보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23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한다. 율법에 매여 있는 것이 곧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윱법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깨우쳐 주기 위해서 보내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보자는 그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죄인의 대가를 대신 갚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말한다. 몽학선생은 가장교사이다. 율법이 가정교사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새 누구도 율법 앞에서는 자기의 의를 자랑할 수 없다. 자신이 되인 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를 알 때 비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중보자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의 가능성과 힘을 다 포기할 때 내 눈에는 중보자가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중보자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내가 신자라면 무엇인가를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또 다시 몽학선생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되고 만다. 중보자가 이 땅에 오신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하다는 것은 자기의 의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됨의 증거를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됨의 증거는 오히려 반대이다.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다 버리고 오직 주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이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의롭게 된다.

29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 유업을 이을 자의 자격은 오직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밖에 없다.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실천이 아니다. 윤리와 도덕이 아니다. 종교행위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증거가 아니다. 그릿도께 속해 있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중보로 오신 분만이 나르 살린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서 중보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누가 자기의 의를 포기하고 말씀을 통해서 중보자를 발견하고 그 분만을 바라보는지를 보자. 이것을 잊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자.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은 열매를 보이게 되어 있다. 열매는 맺으려고 애써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맺어지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했다. 그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고 주님 안에서 용서받은 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