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이제(갈 4:8-11) - 9강

사람들에게는 각자 자기가 선호하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친구든, 음식이든, 분위기든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취하게 되어 있고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일단 관심 두지 않고 멀리 한다는 것은 내 성격이나 취향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며 삽니다. 옷도 자기가 선택하여 골라 입고, 음식도 선택하여 골라 먹습니다. 친구도 선택하여 사귑니다. 내가 뭔가를 선택한다고 할 때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입니다. 나를 돋보이는 옷, 나에게 유익이 되는 친구, 모두가 자신의 유익을 중심으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해가 되는 것은 멀리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이런 사람의 본능 속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면 언제나 자기를 옹호해주고 도와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능 속에서 종교가 나온다면 그 종교의 모습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은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가 자기를 옹호해주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도와주고 지켜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에 자기를 옹호하기는커녕 책망하고, 수치를 드러내고, 약점을 고발하는 그런 원리가 주어졌다면 사람들은 과연 그 원리를 얼마나 선호하겠습니까? 백이면 백 모두가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하나님의 원리가 바로 그러한 방식입니다. 사람을 옹호해주지 않고, 변호해 주지 않고, 오히려 모든 약점과 더러움을 드러내서 제 아무리 양심가이고 도덕군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죄인이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다른 곳에 가면 진짜 신자답고 선하고 예수 같은 사람이라고 추앙 받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만 오면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더러운 모습만이 남게 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겠습니까? 자연히 그 말씀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옹호해주고 지켜주는 말씀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성경은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과는 전혀 동떨어진 새로운 하늘의 법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땅은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더러움을 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보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던 잘못됨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항상 자기를 옹호해주고 이익을 주는 쪽으로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 말씀을 멀리하게 합니다. 복음을 알고 싶다고 하고, 성경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복음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에 대한 옹호는 전혀 없이 스스로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교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그 복음이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성경을 읽는 것조차 소홀히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나의 인생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나가는 것을 중지하지 못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교회 일에도 부지런을 보이는 이유는 차라리 그 쪽이 자기에게 복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성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옹호해주는 쪽으로만 나아가고, 자기를 변호하고 지키기에 애를 쓰면서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마다 지금 나의 형편을 옹호해주고 변호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의 죄악된 모습을 드러내고 책망하는 말씀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8절 시작부터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권능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하고 세상에 복종하는 모습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애굽의 바로 왕이 두려워서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왕까지도 주관하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애굽의 힘있는 바로 왕만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가 세상의 눈치를 보고,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게 잘 보여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가면서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기를 변호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 변호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세상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상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8절의 그 때의 상태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성경이 뭔가 나를 변호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절로 넘어가면 그러한 느낌을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9절을 보면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한 때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제 네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 때의 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종으로 사는 것은 용납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와 이제는 하나님을 알기 전과 하나님을 알고 난 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세상의 종으로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면 그 때의 모습은 벗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었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로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 외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을 멀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된 자가 하나님의 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어떤 형편과 환경에 처해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때에는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 복인줄로만 알고 그 복을 얻기 위해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열심히 지키고 세상 눈치도 보면서 세상의 종으로 살았는데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그것이 다 세상의 초등학문이요 멸망으로 끌고가는 것임을 알고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가 은혜이고 최고의 복은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임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볼수록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들이 깨달아지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때의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이제의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그 때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즐거워하고 감사하면서 이제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