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호세아 1:1-9 호세아의 결혼

<본문>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세아 1:1-9)

<설교>

사람은 예수님을 잊고 살면서도 자신이 예수를 잊고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히려 나만큼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로 살아간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십상입니다.

이러한 착각과 오해에 빠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는 잊고 있으되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자신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음을 판단할 때도 교회 일에 대한 부지런함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16장에서도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믿음은 교회 일에 부지런한 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나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느냐를 보는 것이 옳은 것이지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가를 보면 안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 일에 열심인 자신을 바라보며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종교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은 착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실상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음을 호세아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 형식, 의식 등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신앙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가 종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의식에도 소홀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 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신앙인가를 바르게 분별해야 함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인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으면서도 그 실상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말씀을 하는데 그 내용은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러한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은,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인 시각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입장이나, 그가 겪을 마음고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임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의 입장이나 여러분이 당할 마음고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 자체가 우리의 입장을 배려하신다거나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감히 평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2절의 마지막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행음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행음한 것은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참된 하나님으로부터는 마음이 떠나고 대신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세상의 행복을 약속해주는 바알 신을 하나님과 함께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형편을 드러내기 위해 호세아를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는 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이 누구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은 북쪽에 있는 지명입니다. 이곳 이스르엘은 여로보암의 조상인 예후가 아합의 가족들을 몰살시킨 곳입니다. 이세벨도 이곳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인데 그는 예후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신 것은 예후의 집안이 아합의 집안을 이스라엘에서 몰살시킨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는다’는 말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딸로서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로암미이며 내 배성이 아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게 하시고 그가 낳은 자식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긍휼히 여김 받지 못할 족속들이고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이스라엘은 자기 형편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자기 실체를 바라보면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한 심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을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상한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세 아들을 통해 선포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은 긍휼의 대상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7절)

북쪽 이스라엘은 심판이 선포되고 남쪽 이스라엘인 유다에게는 긍휼이 선포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신앙이 이스라엘보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구별하시는 것입니까?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족속입니다. 즉 유다에게 주어진 긍휼은 약속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구원은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활이나 칼, 전쟁, 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기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뿐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약속 안에 거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 안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의 속마음에는 하나님 말고 의지의 대상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지없이 음란한 여인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여호와의 긍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긍휼을 긍휼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음란한 여인이면서도 스스로는 요조숙녀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러한 착각이 깨어질 때 긍휼에 눈이 띄어질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긍휼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긍휼을 바라보며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기 바랍니다.